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역사(1919~1938)
제임스 P. 캐넌
김현수 옮김
<차례>
트로츠키주의의 정립 - 맑스주의 운동의 연속성 - 사회당 - 러시아혁명의 영향 - 좌파의 형성 - 언어별 연합 - 분파투쟁 - 두 개의 공산당 - 지하활동 - 합법화 투쟁 - 노동자당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성 - 노동조합의 획득 - 노동자 방어 - 분파투쟁 - 사회적 구성 - 지도력의 강화 - 코민테른의 역할 -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시작
맑스주의냐 스탈린주의냐 - 러시아 좌익반대파 -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일국적 편협성 -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 - 코민테른 6차 세계대회 - 캐넌과 스펙터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다 - ‘재판’ 그리고 캐넌, 샥트먼, 에이번의 추방 - 당을 향한 호소 - <투사>를 발행하다 - 분파가 성장하다
미국 공산주의의 부흥 - 편지를 통한 선전 - 캐나다의 스펙터 -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척, 비방, 깡패짓 -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호소하다 - 공개 강연회 - 트로츠키주의 강령 발표 - 좌익반대파 1차 전국대회 - 미국공산주의자동맹 발족
강령과 임무 - 러브스톤 그룹 - 러시아 문제 - 노동조합 문제 - 당 분파와 코민
테른 - 앨버트 웨이스보드 - 스탈린주의자들의 ‘좌선회’ - 고립 - ‘극렬분자’ - 종파주의 - 발간물 - 빈곤 - 국제주의 - “끈기! 끈기! 끈기!”
국제주의 - 실업자운동 - 노동조합 - 독일 사건 - 독일공산당의 항복 - 제3인터내셔널의 파산 - 사회당 내 흐름 - 진보노동행동협회 - 대중활동으로 전환하다 - 종파적 반대파 - 미국노동자당 - 새로운 정당을 위한 캠페인
무엇을 할 것인가? - 패터슨 파업 - 호텔노동자 파업 - 필드 - 미니애폴리스 석탄야적장 파업 - 미국노동자당과 협상하다 - 러브스톤·캐넌 논쟁 – 진군하는 트로츠키주의
1934년의 파업물결 - 톨레도의 오토라이트 파업 - 실업자들의 역할 - 미니애폴리스 트럭기사들의 파업 - 빌 브라운 - ‘조직위원회’ - 패럴 답스 - ‘보안관 패주 전투’ - 7월 파업 - 연방 중재단 - <일간 조직가> - 플로이드 올슨 - 캐넌과 샥트먼의 체포 - 파업 본부에 대한 급습 - ‘하스·더니건 계획’ - 승리
미국노동자당과의 통합 협상 - 머스티 - 살루츠키(하드맨) - 루이스 뷰든즈 - 러드윅 로어 -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조직적 양보 - ‘원칙 선언’ - 국제공산주의 동맹 집행위원회 파리총회 - 트로츠키와 만나다 - ‘프랑스 전환’에 대한 올러·스탬 반대파 - 미국공산주의자동맹과 미국노동자당의 통합 - 노동자당 출범하다
사회당 ‘전투파’ - 스탈린주의자들의 압력 - 스페인의 경험 - 올러 그룹 - ‘범죄적 조합활동’ 재판 - 노동자 활동가 회의 - 조젭 잭 - 재정 위기 - 1935년 6월 총회 - 올러‧머스티‧에이번 분파 - 10월 총회와 올러 그룹 출당
정치냐 조직이냐 - 사회당의 내분 - ‘전투파’와의 협상 - 입당 조건 - 1936년 3월 당대회 - 앨런타운의 스탈린주의 요원들 - 사회당 입당
사회당 내 경향들 - 세계적 상황 - 스페인 내전, 모스크바 재판 그리고 프랑스 노동운동 - ‘트로츠키방어위원회’ - 캘리포니아의 사회당 - <사회주의자의 호소>와 <노동자행동> - <사회주의자의 호소> 전국 회의 - <사회주의자의 호소> 금지령 - ‘함구령’ -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출당 - 시카고 대회 - 사회주의노동자당 출범
이 책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는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활동한 제임스 캐넌이 썼다. 이 책의 무대는 격동의 1920~30년대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 그 뒤를 이은 세계 혁명의 물결, 1920년대 중반 이후 스탈린주의 권력의 타락, 1929년 대공황과 1933년 히틀러 집권, 1930년대 중반 새로운 노동자투쟁 물결의 등장과 급진화가 이 시기에 일어날 일들이다.
특히 이 책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미국에서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하는 혁명가들이 탄생했고, 러시아 스탈린 권력과 코민테른이 타락하면서 어떻게 미국에서도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로 운동이 분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올바른 강령을 가지고 노동자운동 속으로 파고들어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을 건설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레닌 사후의 진정한 맑스레닌주의자들’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1920~30년대에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룬 책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한국에 소개된 책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소중하다. 1920~30년대 격동기의 혁명운동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21세기 세계대공황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시대다. 대기업들에서조차 인력 감축, 임금·복지 축소 공격을 벌이고 있다. 청년층(15~29세) 고용률이 3월에 38.7%로 29년 만에 최저일 정도로 고용불안이 심각해지면서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노조 관료들이 노동자 이익의 수호자가 아니라 줄어드는 자본가 이윤율의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노골적으로 배신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위기가 커지고, 극우 세력은 더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자본가정부는 탄압의 칼날을 곧추세우고 있다. 이처럼 야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대공황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전진할 수 있는가? 진정한 노동자당을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과 실질적 교훈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론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도 많은 투사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한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맑스의 <자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의 세계대공황 국면에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기 위해 맑스의 <자본>을 꺼내들고 있다. 그런 다음 그들 중에서 가장 의식적이고 용기 있는 이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이 1930년대 대공황 국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훌륭하게 실천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적 상황은 1930년대와 상당히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따라서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격동의 현실을 이해하고 제대로 헤쳐 나가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진정한 노동자계급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사상의 올바름이다. 레닌은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사상의 계승을 통해서만 혁명 전통이 수립된다. 혁명 전통이 없는 당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전투적이었기에 급성장했지만 혁명이론이 취약해 결국 유명무실해진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맑스-레닌주의를 포기해 타락해간 스탈린주의 공산당을 통해 혁명이론의 사활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둘째 명실상부한 노동자계급 당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투쟁과 급진화를 기반으로 할 때 제대로 건설할 수 있다. 1930년대 중후반의 계급투쟁 고양은 미국에서 노동자계급 당 건설을 추동하고 뒷받침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노동자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해 있고, 투쟁이 분산적이고 수세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이라면, 이러저러한 당 건설 시도가 무원칙한 대동단결과 분열, 환멸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셋째 노동자계급 당은 혁명가들의 의식적 노력 없이는 건설할 수 없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고양을 팔짱끼고 기다린 것이 아니다. 강령을 정교화하고, 미래 노동자계급 당의 골간대오를 육성하는 등 필요한 과업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계급투쟁의 고양에 철저히 대비했다. 아무리 고양기라 해도, 아무리 노조 투쟁을 열심히 한다 해도 당이 저절로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상승물결을 타고 노동자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당 건설을 위해 매우 의식적으로 분투했다. 머스티 그룹과 통합하고, 사회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사회당에서 나와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창당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분투의 결과였다.
이 책에는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힘겨운 초기 단계를 지난 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1940년대 이후 심각한 위기를 겪었고, 그 위기의 싹은 1930년대에도 존재했다.
미국 노동자계급에겐 정치적 전통이 약했기 때문에,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조차 자연스럽게 자기 투쟁을 노조 틀 안에 가두곤 했다. 1930년대 중후반에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물결이 용솟음쳤을 때도 그런 경향이 꽤 강했다. 그래서 1938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에 함께 한 많은 선진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진 급진적 노조활동가로 보았을 뿐, 사회주의 정치활동가로 여기지 않았다. 즉 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정치조직’으로서 노동자계급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라고 바라보지 못하고, 노조체계 안에서 전투적 반대파로 활동하는 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스스로를 노조 좌파로 여기면서 점점 더 노조 내 상황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방향으로, 결국에는 미국 노총의 관료주의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약점을 우려한 트로츠키는 노조 상층 간부들을 향하지 말고 평조합원들을 향하라고, 특히 흑인처럼 가장 열악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향하라고 여러 차례 주문했다. 그리고 좌파든 우파든 노조 관료들과 대결하면서,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노조 관료들과 타협하는 기회주의 정책 때문에, 결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많은 선진노동자들을 퇴보시켰고, 결국엔 노조 관료들에게 넘겨줬다. 그 결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면 100~200명 규모로 축소됐고, 뛰어난 트로츠키주의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이라는 정체성도 잃어버렸다.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어쨌든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1930년대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여전히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2013년 5월 1일, 김현수
자연, 사회,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역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즉 그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고, 어떤 경로를 따라 성장했으며, 어떤 변화를 겪으며 발전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만, 오직 그럴 때만, 참된 지식을 향한 길은 명확해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트로츠키가 대표하는 복잡하고 과학적인 사상체계를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도 부족하다. 그래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발생과 성장, 발전을 다룬 캐넌의 이 책은 오랫동안 절실했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 게다가 캐넌은 정규 교육을 받은 학생만이 아니라, 배움의 의지와 열의를 가진 선진노동자라면 누구나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측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 캐넌의 설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태동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뒤 1928년에 공산당에서 초기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이 제명당한 것에서부터 1938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만들 때까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여러 발전단계를 다룬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는 원래 1942년 봄에 뉴욕에서 연속해서 강연했던 것이다. 현학자들이나 속물들은 이 책의 대화체 표현에 반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한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역사를 정확히 서술하고자 하는 미래의 역사가들은 역사 자료들을 더 탐구해 캐넌이 쓴 역사를 완성할 것이 틀림없다. 이 책이 철저한 조사에 기초해 광범위한 기록을 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 책을 자료로만이 아니라 안내서로도 크게 의존해야 할 것이다.
미국 공산주의 역사에 관한 몇 안 되는 과거의 글 중에서 객관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령 벤자민 기틀로우의 책 <나는 고백한다>가 그렇다. 이 책은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창건자들에 대해,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장하면서 개인적 지위와 분파적 이익을 위해 무원칙한 투쟁과 비도덕적 음모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은 소부르주아들이라고 악의적으로 기술한다. 기틀로우는 미국에 뿌리를 둔 공산주의 운동을 창건한 것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적인 시대적 요구를 희생시키면서, 썩어 들어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스스로를 팔아넘기고 봉사한 자들과, 자신을 포함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대비시키지도 않는다.
기틀로우나 다른 주관적인 자들이 피상적으로 접근한 것과는 달리, 캐넌은 초기 공산주의의 성장을 특징지은 치열한 내부투쟁에 대해 최초로 정치적 관점에서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설명한다. 캐넌은 개인 간 충돌의 이면에 존재한 정치·이데올로기적 쟁점들을 밝혀낸다. 캐넌이 이런 사상적, 원칙적, 정치적 쟁점들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관점은 완전히 객관적이고 돋보일 수 있다. 미국 공산주의의 발전과 퇴보가 특정 개인들의 좋고 나쁜 특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피상적이고 잘못된 설명으로 빠져들지 않았던 것은, 그가 원칙적인 정치기준을 따랐기 때문이다.
캐넌은 한때 같이 일했거나 만났던 여러 저명한 노동자계급 정치활동가들의 특징을 설명할 때, “죄를 경감해주지도 말고, 그렇다고 적의를 품고 보지도 말라”는 오델로의 격언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공산당에 지금도 남아있는 캐넌의 옛 동료들과 캐넌 자신 사이에는 피의 강이 흐른다. 그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하지만 강연 초반부에 미국 공산주의 운동 초기를 다루면서, 캐넌은 그들을 경멸적으로 낙인찍지 않는다. 그들은 한때 캐넌이 높게 평가했던 공산주의 선구자들이다. 그 뒤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캐넌은 그들에 대해 대충 평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을 평가하는 데서 주관적인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캐넌에 따르면, 미국 공산주의 운동을 창건하고 초창기를 돌파했던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는 미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였다. 영리한 사람들은 떼돈을 벌고 있었지만, 미국 공산당의 분파 지도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공장노동자보다도 열악한 생활조건을 견뎌내며 활동했다.
캐넌은 초기 공산당과 그 지도자들을 아주 정당하게 평가한다. 그가 보기에 모든 분파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적절한 국제 지도부가 있었다면, 분파들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다. 가령 레닌과 트로츠키 시절에는, 조언과 지도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져간 미국공산당 내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그 시절에 당은 더 단단하게 결속했고, 목표를 향해 눈에 띄게 전진했다. 내부 민주주의는 지켜졌다. 하지만 스탈린주의 체제는 신생 미국 공산당의 곤경과 성장통을 일부러 치명적 수준으로 증폭시켰다. 미국 공산당을 타락시킨 주된 책임은 미국 지도부 개개인의 특별한 허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 사상과 실천 체계에 있었다.
캐넌은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을 다루면서, 주요 이데올로기 경향들을 대표한 중요 인물들만을 언급한다. 당시 운동에서 저명했던 인물들은 이 역사책에서도 적절한 명성을 부여받는다. 뒤에 스탈린이 자신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도록 정치무대 위로 올린 우연적 인물들, 무명의 꼭두각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면 미국 공산주의운동을 창건하는 영웅적 시기에는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쳤던 사회당의 특정 지도자들과 어떤 인물들을 다룰 때는 주저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살루츠키(하드맨)에 대해 균형 있게 묘사한다. 이 인물에 대한 평가 근거는 전혀 모호하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미국 공산주의 창건자들은 많은 오류를 저질렀지만, 살루츠키보다 더 자세히 다룰 가치가 있다. 하지만, 캐넌은 살루츠키가 이도저도 아닌 인물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를 가장 위험한 정치적 부류로 만든 심각한 약점에 대해 젊은 세대가 경계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캐넌은 한때 좌파 정치에서 잠깐 두각을 나타낸 사회당 ‘전투파’의 지도자들도 자세히 다룬다. 그것은 젊은 세대가 취미 삼아 잠깐 운동에 발을 담그는 악성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주사를 놓기 위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트로츠키주의를 배반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 내 소부르주아 반대파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역사 속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세심하고 공평하게 다룬다.
이 역사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은 선구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 트로츠키주의 역사는 종종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못하던 시절에 중앙 사무실을 지켰던 동지들과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런 흠 잡을 데 없는 투사들을 평가하면서, 캐넌은 그들이 전체 트로츠키주의 운동 속에서 획득한 지위를 인정한다.
미니애폴리스 동지들은 가난했지만, 당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당에 기부했다. 그들의 정신적 지지도 높게 평가해야 한다. 당시는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들조차 격려와 지지 없이는, 전 세계의 반동적 압력을 견뎌낼 수 없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게다가, 무원칙한 파벌과 무책임한 분파가 당을 위협할 때마다, 그들은 항상 당을 지키기 위해 최선봉에 섰다.
캐넌을 포함해 17명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신념 때문에 지금 감옥에 있는 빈센트 던에게 바친 헌사는, 가장 중요한 트로츠키주의 선구자 중 한 명에 대한 적절한 찬사다.
이 책은 이미 발간된 두 권의 자매편(트로츠키의 <맑스주의를 방어하며>와 캐넌의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사회의 사회주의적 재조직화를 위한 핵심 도구인 노동자계급 정당을 레닌의 방법에 따라 건설하고자 했던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근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세 권의 책은 분명히 미국의 당 창건자들과 조직가들을 위한 안내서가 됐다. 게다가 전 세계 도처에 있는 우리의 사상적 동지들은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요새에서 펼친 트로츠키주의 투쟁의 과정과 발전에서 가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 마치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중국, 서유럽, 남미, 그리고 특히 소련 등 다른 나라 제4인터내셔널의 경험으로부터 배웠듯이 말이다. 캐넌 동지가 책에 기록한 교훈들을 열린 마음과 풍부하게 이해하려는 의지로 연구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1944년 6월 24일, 뉴욕에서 조셉 한센
캐넌은 1942년 뉴욕에서 열두 번의 공개강연을 통해 미국에서 공산당을 건설하기 위해 초기에 영웅적으로 노력했던 과정을 설명한다.
캐넌은 우선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성공과 모범이 어떻게 미국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1, 2, 3장에서 다룬다. 1917년 이후 몇 년 동안 그들이 볼셰비키를 따르는 노동자당을 건설하고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다룬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1928년 이후의 10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1928년은 공산당 지도부가 점점 더 스탈린주의로 기우는 것에 반대했던 베테랑 지도자들과 간부들이 당에서 쫓겨난 해다.
캐넌과 동료들은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을 건설하는 한편, 레닌의 정치노선과 지도 아래 발전한 코민테른의 세계혁명 강령을 국제적 차원에서 계속 실행해나가기 위해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인 트로츠키와 함께 한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혁명 강령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위한 기초다.
대공황의 사회경제적 재앙과 제국주의 전쟁 책동에 맞서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떨쳐나섰음을 보여주는 노조투쟁과 사회투쟁이 1930년대 초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캐넌은 이 투쟁에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이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서술한다. 미국 중서부 북부지방에서 당 활동가들이 계급투쟁적 노조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선진노동자들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결합했는지를 밝힌다. 이 결합 덕분에 노동자 대중운동의 고양기인 1934~38년에 일부 격렬한 계급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캐넌은 이 노력에서 얻은 교훈을 제시한다. 그리고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건설했던 1938년까지를 다룬다.
이 강연으로부터 20년 뒤, 캐넌은 <미국 공산주의 첫 10년>이라는 책을 통해 그 운동에 참가한 지도자의 관점에서 미국 맑스주의 운동의 초기 역사를 보다 자세히 다룬다. 1962년의 책을 통해, 볼셰비키가 이끈 1917년 러시아혁명부터 1928년까지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1942년의 강연[즉, 이 책]에서 처음으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뿌리와 그 선구자들의 성격에 대해 요약해서 결론내렸다는 점을 확인한다.
캐넌은 1890년에 캔자스 주 로즈데일에서 태어났고, 18세에 사회당에 가입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전과 세계대전 동안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순회 조직가이자 사회당 좌파의 지도자였다. 그 뒤,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창건 지도자가 됐다.
1922년 6월부터 1923년 1월까지 소련에서 보낸 7개월 동안, 캐넌은 코민테른 4차대회의 대표단이었고,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상임간부였다. 뒤에 그는 미국에서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이 조직은 정치적 소속과 관계없이 노동자운동에서 전투적으로 싸우다 구속된 노동자계급 구속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한 사람의 상처는 모두의 상처다’라는 노동자계급의 깃발을 들고 투쟁한 전국 조직이었다. 캐넌은 1929년에 미국공산주의자동맹의 창건을 이끌었다. 이 조직은 1938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발전했다. 그는 1953년까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고, 그 뒤 당 의장이 됐다. 그리고 1972년부터 1974년에 죽을 때까지 당의 명예 의장이었다.
이 강연이 있기 바로 몇 달 전인 1941년 12월 8일,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산별노조회의(CIO) 544지부(전 팀스터 544지부) 지도부와 중핵 17명과 함께 캐넌은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연방법정에서 조작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 학살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을 미국 노동운동 안에서 적극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1940년에 만들어져 최초로 544지부와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를 기소한 스미스법이라는 사상탄압법 때문에, 그들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실상 1957년에 대법원이 뒤집긴 했지만, 그 법은 행동만이 아니라 특정 사상에 대한 옹호도 불법화했다. 어렵게 쟁취한 헌법의 권리장전(이것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금지했다)을 위반한 것이다.
1943년 말에 미국 고등법원은[연방법원] 평결의 선고를 승인했다. 그래서 캐넌은 미네소타 주 샌드스톤에 있는 연방교도소에 1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1945년 초에 풀려났다. 고등법원은 다른 17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비슷한 형량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의 독자들은 이 책이 포괄하는 시기에 캐넌이 쓰고 말한 것을 담은 <미국 좌익반대파, 1928~1931년>, <미국공산주의자동맹, 1932~1934>에도 흥미를 느낄 것이다.
캐넌이 쓴 다른 저작으로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을 위한 투쟁>, <선동가 노트>, <재판대에 선 사회주의>,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 <2차 세계대전기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을 향한 연설>, <사회주의 연설> 등이 있다. 이 모든 저작과 <미국 공산주의의 첫 10년>, 조셉 한센이 쓴 <캐넌, 국제주의자>는 패스파인더 출판사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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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발간 50주년 기념판이 1995년에 출판됐다. 그때 우리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인 조셉 한센이 쓴 1944년판 서문도 되살렸고, ‘한 참가자의 보고’라는 원래 부제도 복원했다. 책을 더 읽기 쉽고, 괜찮게 만들려고 본문과 색인을 꼼꼼히 검토해 새로 편집했다.
이 4판에는 최초로 24쪽 분량의 사진을 실었다. 이 사진들은 캐넌이 다룬 세계사의 대사건들과 노동자계급이 이끈 강력한 사회운동을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줄 것이다.
이번 판은 또 다른 측면에서 획기적이다. 패스파인더 출판사가 프랑스어판과 스페인어판을 동시에 출판했다. 캐넌의 강연이 있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전 세계에서 혁명의식을 가진 수백만의 비영어권 노동자들이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를 통해 공산주의의 연속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캐넌의 이 책은 동시대를 다룬 그의 다른 책들만이 아니라, 1983년에 잭 반즈가 맑스주의 정치이론지인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기고한 <그들의 트로츠키와 우리의 트로츠키:오늘날 공산주의의 연속성>과도 단짝이다. 패스파인더 출판사는 이 책의 신판도 새로운 서문을 담아 올해 영어판, 스페인어판, 불어판으로 발간했다.
이 모든 저작은 1928년에서부터 1938년까지의 10년 동안 캐넌과 그 동지들을 이끌었던 볼셰비키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트로츠키주의는 새로운 운동이나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 초기에 상세히 설명하고 실천한 진정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부활시킨 것이다.”
2002년 6월 1일. 잭 반즈
트로츠키주의의 정립
이 노조 회관은 미국 트로츠키주의 역사를 강연하기에 꽤 적절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적 투쟁을 시작했던 1928년에, 내가 처음으로 공개연설을 통해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를 방어했던 곳이 바로 이 강당이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이 물리적 힘으로 우리 강연회를 깨려고 했기 때문에, 강연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거의 14년 전에 우리가 공공연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공개강연 활동을 사실상 여기서 시작한 것이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는 점을 틀림없이 확인할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새로운 운동이나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 초기에 상세히 설명하고 실천한 진정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부활시킨 것이다.
맑스주의 운동의 연속성
볼셰비즘 자체도,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정부들을 지지하면서 노동자계급을 결정적으로 배신하고 맑스주의를 오염시킨 뒤, 진정한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부활시킨 것이었다. 내가 강연에서 다루는 특정 시기(지난 13년)를 보든, 맑스와 엥겔스 사후의 어떤 시기를 보든, 하나의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의 부단한 연속성이다.
진정한 맑스주의의 대표자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때때로 온갖 왜곡과 배신이 운동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정통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운동을 바로 세우려는 세력이 항상 새롭게 등장했고, 전면에 나섰다. 이것은 우리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는 확고한 형태를 갖춘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갑자기 어디선가 완성된 형태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미국 공산당으로부터 직접 등장했다. 미국 공산당 자체도 이전의 운동인 사회당과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으로부터 등장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전쟁 이전과 전쟁 시기에 미국의 혁명적 노동자운동으로부터 자라났다.
사회당
1919년에 조직적 형태를 갖춘 공산당은 처음에는 사회당 좌파로 출발했다. 공산주의자 대오의 대다수는 사회당 출신이었다. 사실, 1919년 9월에 공산당이 공식 출범한 것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당 내부투쟁이 조직적 정점에 이른 것일 뿐이다. 사회당 내부투쟁 과정에서 강령이 작성됐고, 공산당의 조직적 골간이 형성됐다. 결국 내부투쟁이 분열로 이어져 공산당이라는 독자 조직이 창건된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미국 공산당이 창건될 때까지의 2년, 그 뒤 1~2년에 걸친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공고화 과정에서 주요 임무는 사회당으로 대표되는 기회주의에 맞선 분파투쟁이었다. 그것은 노동자정치조직이 타락하는 동시에 혁명적 분파가 탄생하는 경우에 거의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운동은 공식 분열로 나아가기 전에, 다수를 획득하고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다소 협소한 당내 투쟁으로 초기 활동을 제한한다.
새로운 당은 계속해서 기존 정당에서 조직할 사람을 찾는다. 신생 정당이 제 발로 확고하게 서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1919년에 공식적으로 분리한 뒤에도, 관성과 습관 때문에, 그리고 투쟁이 실제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분파투쟁은 계속됐다. 아직 결단하지 못한 사람들과 새 당에 가입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사회당에 남아 있었다. 공산당은 사상을 명료하게 다듬고 사회당원을 추가로 조직하는 작업에 1년 정도 힘을 집중했다. 그런 역사적 사건들에서 늘 그렇듯, 결국 분파의 단계는 계급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하고, 새로운 부대를 충원하며, 새로운 조직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전시키는 단계로 이어졌다.
러시아혁명의 영향
나중에 공산당이 된 사회당 좌파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부터 직접 고무받았다. 그 전에는 미국 투사들이 진정한 맑스주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사회당 지도부는 맑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맑스주의 문헌은 아주 조금밖에 출판되지 않았다. 그것도 거의 경제서적들로 국한됐다. 사회당은 이질적 조직이었다. 사회당의 정치활동과 선전·선동 내용은 온갖 급진적, 혁명적, 개량적 사상들로 뒤범벅돼 있었다.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시기에도, 명확한 강령적 지침을 찾아 당에 들어온 젊은 투사들은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 사회당의 저명한 지도부는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기회주의 지도부를 그대로 빼닮았다. 이론을 더 모르고, 더 무시했다는 점만 달랐다. 그 결과, 미국 운동의 수많은 젊은 투사들은 혁명적 본능과 충동을 갖고 있었지만, 혁명운동을 일관되게 펼치기 위해 필요한 맑스주의를 거의 배울 수 없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은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모든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혁명 승리의 엄청난 충격파가 미국 운동을 뿌리까지 뒤흔들어놓았다. 러시아혁명에 고무받아 사회당의 혁명적 분파는 엄청나게 강화됐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었다. 전에는 혁명의 이론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치솟았다.
좌파의 형성
곧바로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조직가들과 지도자들이 단지 실천적 혁명가가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처음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혁명적 맑스주의 정치를 설명해 준 것은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 지도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국제 노동운동에서 왜곡되지 않은 맑스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 러시아의 승리가 가져다 준 엄청난 권위와 명성 덕분에, 그들은 마침내 모든 나라에서 청중을 갖게 됐다. 모든 진지한 투사들은 그들 주위로 결집했고, 전례 없는 관심과 열정으로 그들의 저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설명한 사상은 실천적 입증 덕분에 열 배의 권위를 획득했다. 게다가, 세계 자본주의가 그들에 맞서 모든 힘을 동원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위대한 혁명을 발전시키고, 적군(赤軍)을 창설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보여줬다. 자연스럽게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 모든 노동자정치운동의 혁명서클들이 볼셰비즘을 권위 있는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토대 위에서 사회당 좌파가 형성됐다. 사회당 좌파는 자체 기관지, 조직가, 강연자, 필진을 갖추고 있었다. 공산당이 공식 출범하기 4~5개월 전인 1919년 봄에, 우리는 뉴욕에서 사회당 좌파의 첫 전국회의를 열었다. 당시에 나는 캔자스 시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우리 분파가 미래의 분리를 준비하면서, 당내 당의 형태를 갖춘 것이 바로 이 회의에서였다. 공식 기관지의 이름은 <혁명시대>였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진짜 사상을 미국 노동자들에게 처음 소개한 것이 이 신문이었다. 바로 이 신문의 편집자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볼셰비키 사상을 자세히 소개하고 대중화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공산주의 창시자로 역사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프라이나다. 그의 심장은 그의 두뇌만큼 강하지 못해 투쟁과정에서 굴복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죽음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그는 뒤늦게 그쪽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불운일 뿐이다. 그가 초기에 했던 일은 모두 유효하다. 그 누구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당시 운동에서 또 한 명의 저명한 인물로 존 리드가 있었다. 그는 지도자도 정치가도 아니었지만, 도덕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존 리드는 미국 사회주의 언론인으로서 러시아로 건너가 혁명에 참여했고, 그것을 진실하게 보도했다.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다.
언어별 연맹
초기 사회당 좌파의 대다수는 외국 출신이었다. 20년 전 당시에 미국에서 기층 노동자계급의 상당수는 외국 출신이었다. 전쟁 전에는 이민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것은 거대한 노동력을 축적하려는 미국 자본의 필요를 충족시켰다. 이들 이민자의 다수는 자국에서 사회주의 정서를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외국어를 쓰는 사회주의운동이 급속히 늘어났다. 외국 출신들은 사용하는 언어별로 연맹을 조직했고, 사회당 안에서 자치권을 누렸다. 8~9천 명의 회원들이 가입한 러시아어 연맹, 5~6천 명이 가입한 폴란드어 연맹, 3~4천 명이 가입한 우크라이나어 연맹, 약 1만 2천 명이 가입한 핀란드어 연맹 등이 있었다. 이처럼 당에는 외국출신 당원이 매우 많았다. 이들 대다수는 러시아혁명의 깃발 아래 모였다. 사회당이 분열한 뒤 초기 공산당원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이 이들이었다.
이 언어별 연맹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당을 통제하고자 했고, 실제로 통제했다. 자신이 대표하는 언어별 연맹 덕분에, 그들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영향력을 너무 많이 행사했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좋은 일이었다. 왜냐면 그들 대부분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당에 볼셰비즘 사상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는 다른 측면에서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에 있었다. 그들은 운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운동은 처음부터 외국에서 흘러들어온 종파주의에 시달렸다. 자기 뒤에 있는 조직원들 덕분에 실권을 가졌다는 점에서 당을 지배한 그 지도자들은 미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미국 노동자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 결과, 초기 운동은 비현실성의 과잉으로 고통받았다. 또한 많은 경우에 당을 미국의 실제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켜 사고하고 활동하는 낭만주의적 기운조차 존재했다. 기이하게도, 이 언어별 연맹 지도자의 다수는 자신이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통제하기로 했다.
분파투쟁
처음에는 사회당 좌파 안에서, 그리고 뒤에는 공산당 안에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은 이른바 ‘지도권을 둘러싼’ 엄청난 분파투쟁에 시달렸다. 외국출신 지도자들의 지배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일반적으로 미국과 같은 주요 제국주의 국가에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주노동자는 전체 인구의 소수로서 평등한 권리들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지만 그 권리들을 결코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당 좌파와 초기 공산당에서는 이 관계가 뒤바뀌었다. 슬라브계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대변됐다. 러시아인,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레트인[라트비아인], 핀란드인 등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압도적 다수였고, 우리 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하는 토박이 미국인은 소수였다. 처음부터 우리는 박해받는 소수파로서 투쟁했다. 처음에 우리는 거의 승리하지 못했다.
처음엔 사회당 좌파 안에서, 그 뒤 독립한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나는 미국인 지도부와 미국에 맞는 길을 추구하는 분파에 속했다. 토박이 노동자들의 운동에 정통하고 긴밀하게 연결된 지도부를 세우지 않으면, 미국에서 어떤 운동도 건설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마찬가지로 그들 다수는 미국인이 진정한 볼셰비키가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영어로 표현할 때는 우리를 원하고 인정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회주의와 중도주의로부터 운동을 지키기 위해 계속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년 동안 싸우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뒤, 결국 언어별 연맹 지도자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은 미국 출신 지도부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두 개의 공산당
지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조직형태에 관한 투쟁으로 나타났다. 언어별 그룹들은 자율적 연맹으로 조직돼야 하는가 아니면 민족적 체계나 자율적 권리를 갖지 않는 지역 지부들로 조직돼야 하는가? 중앙집중적 당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연방정당을 만들 것인가? 당연히 중앙집중적 당이 볼셰비키의 구상이다. 하지만 중앙집중적 당에서는 언어별 그룹들을 단단한 블록으로 쉽게 결집시킬 수 없었다. 반면 연방정당에서 언어별 연맹 지도자들은 당대회 등에서 지지자 표를 확실히 통제함으로써 당에 맞설 수 있었다.
이 투쟁은 1919년 뉴욕에서 열린 사회당 좌파 회의를 교란시켰다. 사회당 전국대회에서 분열이 발생했을 때, 이미 좌파 세력은 자체적으로 분열돼 있었다. 그래서 사회당에서 분리해 나온 공산주의자들은 단일정당을 건설할 수 없었다. 며칠 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공산당이 건설됐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언어별 연맹이 이끈 다수파는 미국공산당을 건설했고, 나머지 소수파는 공산주의노동자당을 건설했다. 후자는 주로 미국 출신과 미국화한 외국 출신들로 이뤄졌다. 당연히 다양한 변수와 개인적 부침이 있었지만, 주요 구분선은 그것이었다.
지하활동
독립적 공산주의 운동이 같은 강령을 갖고 있으면서도 둘로 갈라져 격렬히 싸운 것은 불길한 출발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갈라진 대오는 끔찍한 박해를 받았다. 미국에서 1919년은 전후 대반동의 해였다. 지배자들은 ‘민주세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차 대전을 치른 후, 미국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픈숍’제도를 추가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모든 노동자조직을 겨냥해 애국주의 광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잡혀갔다. 새로운 공산당은 이 공격의 초점이 됐다. 연안 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조직이 습격당했다. 전국지도부든 지방지도부든 사실상 모든 지도부가 잡혀갔고, 이런저런 이유로 기소됐다. 외국 출신 투사들은 대규모로 추방됐다. 탄압 때문에 운동은 지하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두 당의 지도부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운동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첫 해에, 우리는 서로 갈라져 갈등하는 두 개의 공산당이라는 불명예, 추문, 조직적 재앙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몇 달 뒤에는 지하 그룹과 지부의 형태로 조직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초까지 공산주의 운동은 비합법상태로 머물렀다. 탄압의 첫 충격이 가시고, 각 그룹과 지부가 지하에 안착했을 때, 운동은 대중의 삶과 노동조직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됐고, 비현실적 경향의 지도자들이 힘을 얻었다.
여전히 두 당은 서로간의 분파투쟁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교리를 다듬고, 사소한 트집을 잡는 것이 취미가 됐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초좌익주의가 매우 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이 살아있는 노동운동으로부터 고립될수록, 대중운동과 관계가 약해질수록, 대중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어려워질수록, 문구와 강령을 더욱 급진화하는 것이 고유의 법칙인 듯하다.
이 운동의 역사를 엄밀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당시에 발간된 일부 당 출판물들을 검토해야 한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좌익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공개모임을 갖지 못했다. 노동자들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고, 우리 슬로건에 대한 반응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비공개 모임들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점점 더 운동의 지도부 자리를 차지했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급진주의’가 판을 쳤다.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은 거의 초좌익주의가 지배했다.
1920년 대선 때, 운동은 여전히 비합법 상태에 있었고, 자신의 후보를 내세울 방법이 없었다. 당시 사회당은 유진 뎁스를 후보로 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당과의 격렬한 분파투쟁을 이유로 그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아주 급진적 방침을 정했다. 노동자들에게 선거 보이콧을 호소하는 단호한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후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가령 1940년대에 사회주의노동자당(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기술적, 재정적, 조직적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후보를 낼 수 없었다. 또한 지지할 후보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태가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공산당은 무슨 일에 대해서든 입장을 발표했다. 내가 종종 성명서에 관심이 없는 것은 공산당 초기에 성명서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성명서를 내야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적게 내되 더 중요한 일에 성명서를 내는 것이 더 낫다. 그럴 때 성명서는 무게를 갖는다. 어쨌든 선거 보이콧을 호소한 1920년의 성명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운동에서 강력한 반(反)의회 경향이 성장했고,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읽었고, 모두가 이론적으로는 선거 참여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선거 참여를 위해 실제로 역량을 투여하지는 않았다. 당이 선거활동에 진지하게 나서기까지는 수년이 흘러야 했다.
또 다른 초좌익적 견해도 초기 비합법 공산당에서 우세했다. 그것은 비합법 상태의 유지를 혁명적 원칙으로 여기는 시각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합법성의 이점을 누려왔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안에서 합법정당이 아닌 다른 존재방식을 아는 동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합법주의 편향이 자라날 가능성도 꽤 있다. 당은 지배계급의 태도와 무관하게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어야 하기에, 탄압받는 시기에 그런 동지들은 어느 정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혁명정당은 비합법 형태로도 활동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것이다.
비합법 정치조직과 공개 정치조직 모두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공개 정치조직이 훨씬 더 경제적이고 유리하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것이다. 그것이 노동자들을 만나고, 당원으로 조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볼셰비키는 가장 혹독한 탄압의 시기에도 항상 가능한 모든 공개활동의 기회를 붙잡고 활용하고자 노력한다. 만약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다면, 가능한 최대로 말하고, 부족한 것은 다른 방식의 합법적 선전으로 보충할 것이다.
우리가 러시아혁명 지도자들의 저작과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하기 전이었던 공산주의 운동초기에 비합법당을 원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자라났다. 시간이 흘러 반동의 물결이 가라앉자, 합법활동의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당이 합법화를 향해 약간 전진하려 하자, 엄청난 분파투쟁이 벌어졌다. 1921년과 1922년 초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다수는 비합법 상태가 아닌 당은 혁명적일 수 없다는 믿을 수 없는 견해를 공유했다.
노조 문제에서도 ‘급진주의’가 팽배했다. 이 끔찍한 초좌익주의적 병균은 고립된 운동에서 가장 잘 자란다. 운동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돼, 오류를 적절히 교정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언제나 초좌익주의가 자라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분리한 세력들에서 그런 초좌익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주장이 사회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수록, 그들의 입장은 더 극단적이고, 더 비이성적이며, 더 우스꽝스럽게 변한다.
공산주의운동의 첫 비합법 대회에서 노조문제가 의제로 올랐다. 이 대회는 분열과 통합을 낳았다. 언어별 그룹들이 이끄는 공산당에서 루덴버그 분파가 분리했다. 그들은 공산주의노동자당과 함께 1920년 5월에 미시건 주 브릿지맨에서 열린 통합대회에 참여해 새로운 통합공산당을 선포했다(1922년 8월에 브릿지맨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은 또 다른 대회와 혼동해선 안 된다). 통합공산당은 우위에 섰고, 1년 뒤에는 공산당의 남은 절반과도 통합했다.
나는 1920년 대회에서 채택한 노조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또렷이 기억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배운 것에 비추어본다면, 그 결의안은 소름끼치는 것이다. 결의안은 미국노동총연맹(AFL)을 ‘배척’하라는 호소였다.
‘일자리를 얻고자 미국노총에 속해서 일해야만 하는’ 당원들은 부르주아 의회에서 공산당이 활동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미국노총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해 활동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많은 오류처럼, 이 어리석은 오류는 뒤에 교정됐다. 이런 우스꽝스런 일들을 저지른 많은 이들이 뒤에는 그것을 깨닫고, 정치운동을 더 잘 해나갈 수 있었다.
러시아혁명을 따르는 젊은 세대는 사회민주당의 기회주의적 배신에 맞서면서 지나친 급진주의를 선택했다. 1921년 코민테른 3차 세계대회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공공연하게 ‘우파’의 입장에 섰다. 레닌은 의회 활동, 노조 활동과 관련해 독일의 초좌익주의를 겨냥하는 <좌익소아병>을 썼다. 대회 결의안과 함께 이 팜플렛은 초기 코민테른에서 초좌익주의 경향을 정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는 속물들이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건설 과정을 우스꽝스런 한바탕 소동으로 묘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산주의 운동은 부정적 측면보다 긍정적 측면이 많았다. 용기 있고 헌신적인 수천 명의 혁명가들이 운동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 했고, 위험을 감수하려 했다. 그들은 오류를 많이 저질렀지만, 미국에서 전례 없는 당을 건설했다. 즉 맑스주의 강령, 뛰어난 지도부, 규율 잡힌 대오를 갖춘 당을 건설한 것이다. 비합법 시기를 견뎌낸 사람들은 규율을 습관화했고, 다음 시기에 위대한 역할을 할 방법을 배웠다. 당시에 우리는 그런 기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강령을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웠다. 소송을 처리하듯 사회주의를 다루는 사람들이 권력 장악을 목표로 혁명운동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과 영원히 단절했다. 구 사회당의 전형적 지도자는 법을 다루는 변호사, 기도하는 목사, 작가 등 이러저러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나타나 거들먹거리며 연설하곤 했다. 상근자들은 실질적인 당내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궂은 일만 하는 실무자였을 뿐이다. 혁명적 충동과 열정을 가진 평당원들과 최상층 소부르주아 인사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공산당은 초기에 소부르주아 인사들과 완전히 단절했다. 이 과거의 지도자 중 단 한 명도 러시아혁명을 진심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절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평당원 중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했다. 새로운 지도자는 당을 위해 일하는 직업적 노동자여야 한다는 점을 처음부터 원칙으로 정했다. 지도자는 당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삶을 바쳐야 한다. 노동자들을 이끌고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는 당이라면, 다른 형태의 지도부란 생각할 가치도 없다.
비합법 상황에서 러시아 지도자들의 저작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활동을 계속했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덱, 부하린이 우리의 스승이었다. 우리는 태만했던 옛 사회당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사상과 강령을 매우 진지하게 대하는 혁명가의 정신으로 교육받은 것이다. 고립되고 쪼그라들수록 운동은 내부활동에 집중했고, 격렬한 분파투쟁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합법화 투쟁
지하의 막다른 골목에 갇힌 운동은 정체하기 시작했다. 우리 지도부 중 일부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합법적 방식으로 미국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도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우리는 새로운 분파를 만들었고, 나와 러브스톤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1922년 봄에 루덴버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우리와 함께했다.
운동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은 1년 반에서 2년 동안 누그러지지 않고 계속됐다. 우리는 운동의 합법화를 단호하게 찬성했다. ‘운동의 합법화는 일종의 배신’이라고 확신한 사람들도 똑같이 단호하게 저항했다. 결국 1921년 12월에 우리는 중앙위원회에서 근소한 차이로 다수파가 됐고, 합법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대오 내 저항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당을 합법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강연회를 열기 위한 몇몇 합법 그룹을 조직했다. 그 뒤 이 그룹들을 미국노동동맹이라는 중앙기구에 편제하기 위해 대회를 소집했고, 동맹을 선전조직으로 전환했다. 1921년 12월에 우리는 비합법 공산당을 해산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제안에 다수가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합법 공산당과 공존하는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조직으로서 노동자당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비합법 공산당을 유지하면서 외곽에 합법적 노동자당을 건설하기로 타협한 것이다. 2~3천명의 완고한 비합법 활동가들은 합법화를 위한 이런 임시조치에 대해서도 저항했다. 그들은 분리해서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노동자당
우리는 합법과 비합법에서 두 개의 당을 갖게 됐다. 노동자당은 매우 제한적인 강령을 가졌지만, 모든 합법적 대중 활동을 펼치는 매개체가 됐다. 통제권은 비합법 공산당에 있었다. 노동자당은 탄압받지 않았다. 워싱턴과 여타 지역에서 반동의 물결이 지나갔고, 자유주의 정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공개 행사와 강연을 열 수 있었다. 신문 발간과 선거운동 등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렇게 불편한 두 개의 당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비합법 조직을 정리하고 모든 활동을 합법정당으로 집중하기를 원했고, 탄압을 받을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새로운 반대에 부딪혔다.
투쟁은 중단 없이 계속됐고, 결국 우리는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에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호소했다. 대회에서 나는 이른바 ‘청산파’의 대표였다. 이 명칭은 볼셰비즘의 역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1905년 혁명이 패배한 뒤 언젠가, 한 멘셰비키 분파가 비합법 당을 청산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그들은 모든 활동을 짜르 전제군주의 ‘합법성’ 안으로 가두려 했다. 레닌은 그 제안의 지지자들에 맞서 무자비하게 싸웠다. 왜냐면 그것은 혁명활동과 혁명조직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들을 ‘청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에서 비합법 당을 정리하자고 제안하고 나섰을 때, 러시아의 볼셰비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좌파는 자연스럽게 레닌의 표현을 빌려와 우리를 ‘청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우리는 코민테른 대회에 앞서 결판을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트로츠키를 만났다. 이 투쟁 과정에서 우리는 러시아 지도자 개개인에게서 지지를 얻고자 했다. 나는 1922년 여름과 가을의 몇 달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청산주의에 맞선 캠페인이 우리를 능가했고, 러시아인들이 청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외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상황을 잘 몰랐던 그들은 우리에 대해 선입견을 갖기 쉬웠다. 그들은 당이 실제로 금지돼 있다고 추정했고, 질문에 대해 곧바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곤 했다. “만약 동지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면, 비합법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어쨌든 동지들은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 정세에서는 합법 공산당이 가능했다. 그게 우리의 주장이었다. 그 올바름은 이후의 모든 경험을 통해 입증됐다. 결국 나와 몇몇 동지들이 트로츠키 동지를 만나 한 시간 동안 우리 견해를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트로츠키는 몇 가지를 물은 뒤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면 됐다. 나는 ‘청산주의자들’을 지지한다. 레닌한테 말하겠다. 레닌도 확실히 동지들을 지지할 것이다. 모든 러시아인이 당신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정세 판단의 문제일 뿐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비합법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레닌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트로츠키는 지금 레닌이 아프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만약 레닌이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레닌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국 문제를 다루기 위한 코민테른 위원회가 설치됐다. 우리는 논쟁하기 위해 위원회로 갔다. 트로츠키와 레닌이 ‘청산주의자들’ 편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다. 그래서 전반적 분위기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위원회 토론에서 지노비에프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에 대해 뛰어나게 연설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연설을 잊지 못한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 우리 당에 큰 도움이 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라덱과 부하린도 같은 입장에서 연설했다. 이들 세 명은 당시 코민테른에 파견된 러시아 공산당의 대표들이었다. 철저하고 충분하게 토론한 다음, 다른 당의 대표들도 미국 공산당을 합법화한다는 견해를 전면 지지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코민테른 세계대회의 권위 덕분에, 미국의 합법화 반대세력은 곧 잠잠해졌다. 1921년에 공산당의 외곽 합법조직으로 만들어진 노동자당은 대회를 열어 보다 명료한 강령을 채택했고, 비합법 조직을 완전히 대체했다. 1923년 이후의 모든 경험은 그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세에서는 합법조직이 정당했다. 불필요한 때에 비합법 상태로 남았다면, 혁명활동에 끔찍한 재앙, 낭비, 치명적 손상을 초래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는 혁명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한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당의 합법화에 동의하지 않은 한 작은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합법 상태로 머물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본부를 보스턴에 두고, 클리블랜드에 지부 하나를 뒀다. 우리는 이 비합법 그룹이 몇 년 동안 이따금씩 일종의 입장을 발표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7년 후 우리가 공산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건설할 때, 이 보스턴 그룹이 트로츠키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우호적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우리는 어떤 도움이든 아주 절실했기 때문에, 이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보스턴에 갔을 때, 지역 동지들이 보스턴 그룹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들은 매우 음모적이었다. 옛 비합법 방식으로 나를 미팅 장소로 데려갔다. 나는 그 조직의 공식 위원회를 만났다. 서로 인사한 다음, 그 조직의 지도자가 나한테 말했다. “쿡 동지, 동지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봐요.” ‘쿡’이란 이름은 비합법 당 시절에 내가 썼던 가명이었다. 그는 비합법 미팅에서 내 실제 이름을 쓰려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왜 당에서 쫓겨났고, 우리 강령이 무엇인지 등을 설명했다. 그들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기초해 두 조직을 통합해 새 당을 만드는 문제에 관해 토론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한 가지 점에서 동의를 받고 싶어 했다.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비합법 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몇 가지 농담을 나눈 뒤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비합법 상태로 있는 것같다.
동지들, 지금까지 다룬 것은 우리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이자 서론이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서 운동을 재건하기 전에 몇 년간 초기 공산당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다룰 것이다.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성
지난주에 나는 미국 공산주의의 초기 개척시대를 다뤘다. 비록 많은 것을 생략하고 중요한 부분만 다뤘지만, 비합법 공산주의 운동을 합법화하고 공개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를 지나칠 수 없었고, 좌익소아병을 포함해 초기 운동의 부정적 측면들에 대해 다뤘다. 좌익소아병, 즉 초좌익주의의 악성 소아병은 운동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늘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여러 활동들에서 비현실적이었던 부정적 측면보다는 미국에서 최초로 볼셰비키의 원칙에 기초해 혁명정당을 창건했다는 긍정적 측면이 더 크다. 그것은 공산주의 선구자들의 위대한 공헌이다. 당을 건설한 일군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기본 저작 중 일부를 소화했고, 진지한 노동자당 건설의 필수조건 중 하나인 규율로 무장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진지한 혁명정당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중 하나인 전문적인 지도기구를 창출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아주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젊은 공산당 사이에서 벌어진 주도권 투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IWW는 상당히 큰 전투적 노동자운동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이 조직은 명백히 가장 많은 노동자투사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반면에 공산당 중핵은 사회당 출신들로서 상당수가 소부르주아 출신이었다. 젊은 공산주의자 다수는 계급투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수천 명 규모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계급투쟁에 실질적으로 동화되지 못한 외국 출신 노동자들이었다.
인적 자원이라는 측면만 고려한다면, IWW가 훨씬 더 우세했다. 그 투사들은 많은 투쟁을 통해 검증돼 왔다. IWW의 수많은 투사들이 감옥에 있었다. 그들은 혁명적 어구를 자신 있게 말하며 갑자기 등장한 운동을 무시하듯이 바라보곤 했다. IWW는 이제까지 자신들이 보여준 행동과 희생이 새로운 혁명운동의 단순한 교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이 경쟁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오판했다.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22년에, 노동자계급 선진층을 주도하는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공산당이 IWW를 대체했다는 사실이 정말 분명해졌다. IWW에는 노동자투사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영웅적 투쟁을 숱하게 전개해왔다. 그래도 공산당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통해 자기 사상을 벼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상과 이론을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직은 퇴보했다. 반면 경험 없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조직은 기반이 취약했지만, 살아 움직이는 볼셰비키 사상을 붙잡았기 때문에, 몇 년 내에 IWW를 완전히 제치고 훨씬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이 경험의 위대한 교훈은 혁명정당의 건설에서 다른 것이 올바른 사상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상상하며, 사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획득
당은 합법화 문제로 초좌익주의에 맞서 싸운 뒤, 공개 무대로 나왔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당은 미국 노동자계급 선진층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적절하게도 미국 전역에서 공산당을 가장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조직으로 평가했다. 당은 미국 출신 노조원 일부를 당원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철강파업에서 활약하며 유명해진 윌리엄 포스터와 여러 노조 활동가들(꽤 큰 그룹)이 외국 출신들로 구성돼 다소 이국적이지만 역동적인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렇게 당 전체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골방에서 비현실적인 문제로 논쟁하고 말다툼하며 이론을 지나치게 갈고닦는 작업에서 대중운동으로 당의 활동방향을 바꿨다.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실제 문제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당은 점점 더 ‘노조’처럼 변해갔다. 당시 미국에서 거의 유일한 노동조직이었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노동총연맹(AFL)을 향해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당의 합법화를 위해 투쟁하는 동시에, 당의 노조 정책을 올바로 교정하기 위해서도 투쟁했다. 이 투쟁도 성공적이어서 애초의 종파적 입장을 극복했다. 공산주의 선구자들은 독자 노조를 선호했던 초기의 종파적 선언을 수정했고, 이제 공산당의 역동적 힘을 반동적 노조에 쏟아 부었다. 이런 방향전환을 주되게 뒷받침한 것도 모스크바, 레닌, 코민테른이었다. 레닌의 훌륭한 팜플렛 <좌익소아병>은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22~23년에는 당이 노조운동으로 잘 파고들 수 있었고, 일부 지역의 몇몇 노조에서 의미 있는 영향력을 빠르게 획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광부 노조와 의류 노조에서 그랬다. 다른 노조들에서도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질적이고 전적으로 진보적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당은 어느 정도 기회주의적인 모험에 빠져들었다. 어떤 당도 오류를 완벽하게 바로잡기는 어렵다. 오류를 지나치게 수정하려다가 종종 역편향에 빠지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생 정당은 정치운동, 소부르주아계급, 노조 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조운동과도 무관하게, 고립된 지하에서 이론을 정교화하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 이제는 노동자․농민 정치의 영역에서 일련의 거친 모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동자대중운동의 충분한 뒷받침이나 공산주의자들 자신의 충분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일련의 책략과 연합을 통해 갑작스럽게 광범위한 농민노동자당을 만들려 했던 당 지도부의 시도 때문에, 당은 혼란에 빠졌다. 새로운 내부 투쟁이 촉발됐다.
당의 합법화를 둘러싼 분파투쟁이 끝난 지 6개월쯤 지난 1923년에 새로운 분파투쟁이 시작됐다. 이 투쟁은 1928년에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당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됐다. 우리를 내쫓을 당시 지도부였던 러브스톤 그룹이 쫓겨난 1929년 봄까지도 투쟁은 맹렬하게 계속됐다. 그 뒤,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은 독립적 개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쫓아냈고, 스탈린주의에 충성스런 지도부를 세움으로써 분파투쟁을 종식시켰다. 그들은 관료적 방식으로 당의 획일적 평화를 확보했다. 그리고 사상적 정체와 쇠퇴의 평화를 확보했다.
노동자 방어
당은 이 시기 내내 분파투쟁으로 요동쳤지만, 그 와중에도 여러 분야에서 자기 활동을 펼치며 계급투쟁에서 엄청난 일들을 해냈다. 당은 미국 최초로 혁명적 일간신문을 발간했다. 1,000~1,500명 규모의 당으로서는 상당한 성취였다. 선전활동을 광범위하게 펼쳤고, 전례 없는 규모로 노동자 방어 활동을 조직했으며, 노동운동에 많은 혁신적인 것들을 도입했다. 또한 사실상 거의 모든 중요한 파업을 지도했다.
특히, 전국에서 주목한 1926년의 위대한 퍼세이익 파업을 공산주의자들이 온전히 지도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노동계급 운동의 다른 어떤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경향의 지도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냈다.
분파투쟁
관망하는 많은 전문가들과 논평가들은 미국 공산주의 초기를 어리석음과 오류, 사기, 타락으로 가득찬 시기로 묘사하려 한다. 때로는 환멸을 느끼고 변절한 자들도 그렇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되고,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평가다. 초기 공산당 내 분파투쟁은 단지 개개인이 악의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다. 만약 어느 정도 사실을 파악하고 주의 깊게 사태의 흐름을 연구한다면, 분파투쟁의 일정한 법칙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정치조직에서, 특히 신생 조직에서 그 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분파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짐짓 아는 체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지만, 분파투쟁이 공산당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 시작된 이래, 모든 정치조직은 분파투쟁을 겪어왔다. 그런데도 초기 공산주의자들의 분파 문제가 유독 주목을 끌어왔다. 그것에는 속임수가 있다. 마치 다른 조직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분파문제 중 일부 부정적 측면만을 끄집어내 얘기한다. 유진 라이온스와 맥스 이스트먼 같은 떠벌이들, 노동자계급의 실제 투쟁에 제대로 결합한 적이 없는 경솔한 사람들의 특기가 바로 역사 왜곡이다.
최근에는 벤자민 기틀로우처럼 과거를 반성하는 배신자들이 그쪽으로 합류했다. 아주 철저하게 좌절하고 환멸을 느낀 기틀로우는 젊었을 때 맞서 싸웠던 [부르주아]민주주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자기 영혼을 파괴한 주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애처로울 뿐이다.
그들은 분파투쟁을 정말 기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전혀 칭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때면, 그들은 특히 열광한다. 공화당이나 태머니홀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우리가 사회당에서 봤던 부정부패와 역겨운 위선으로 점철된 파벌투쟁에 대해서는 눈감고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오직 공산당 초기 기록에서 흠을 발견할 때만 신성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비난을 퍼붓는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찬사를 바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의 고착된 정치조직보다는, 갓 출발해 소아병을 앓고 있더라도 공산당한테 기대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여기에는 진실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수단은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자계급 운동에서 진실을 속이고 명예롭게 처신하지 않는 것은 공산주의의 위대한 목표와 충돌한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눈에 도드라진다. 체계적인 거짓말, 속임수, 도적질, 표리부동 등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정치조직의 특성들은 그 조직들과 그런 환경에서는 태생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운동 초기 10년의 특징이었던 분파투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서로 손잡았던 깡패들이 전리품을 놓고 싸우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기에는 전리품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세계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을 조직하겠다는 진지한 목적과 동기를 갖고, 공산주의를 개척했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할 각오가 돼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깃발을 들고 1919년 시카고 대회에서 5,000~6,000 명에 이르는 대규모 운동을 조직한 사람들은 정말 그랬다. 엄청난 탄압이 시작된 뒤, 체포와 추방, 비합법 활동의 고난, 재정적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에 남았던 사람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 모든 칭얼대는 사람들(그런 희생과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에 옆으로 비껴나 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선구자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분자로 묘사하려 한다. 그들은 그림 전체를 간단히 뒤집어버린다.
공산주의 운동 초기에 당에 매력을 느낀 최상의 분자들은 비합법 활동 시기의 탄압과 고난을 거치며 더 명확하게 걸러졌다. 분파투쟁은 몇몇 개인의 나쁜 의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물론 몇몇 악한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과상자에서도 썩은 사과 한두 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오랜 분파투쟁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사회적 구성
나는 첫 강연에서 당의 구성에 내포된 엄청난 모순을 설명했다. 한편에는 아직 동화되지 못한 나라에서 운동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대부분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운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맹신했다.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에는 숫자가 더 적은 미국출신 그룹이 있었다. 이 미국 출신 그룹은 외국 출신들만큼 공산주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그것은 사실이다), 운동이 미국 지향성과 현지 출신 지도부를 가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바로 이 모순이 분파투쟁을 추동했다.
다른 요인도 있었다. 경험 많고,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없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뒤, 운동은 거의 하룻밤 새에 급속히 커졌다. 나이 들고 권위 있는 사회당 지도부 전부는 볼셰비즘을 거부했고, 안전한 개량주의의 길을 꼭 붙들었다. 힐큇과 버거를 포함해 사회당의 모든 주요 인사들은 러시아 혁명과 청년 혁명가들에게 등을 돌렸다. 심지어는 그 열망에 공감했던 뎁스마저도 결정적 순간에는 힐큇과 버거의 당에 남았다.
새 운동은 새 지도자들을 찾아야 했다. 전면에 나선 사람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경험도 많지 않았고, 개인적 권위도 갖지 못했다. 당이 더 자질 있는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는 일련의 오랜 분파투쟁을 벌여야 했다. 대회를 거치면서 집행부가 빠르게 바뀌었다. 이 격렬한 분파투쟁을 견디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은 거칠게 떠밀려 나가떨어졌다. 지도력이 있는 듯해서 첫 해에 선출됐던 많은 사람들이 다음 해에는 완전히 밀려났고,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로 대체됐다.
이 모든 과정은 투쟁 속에서 지도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지도자를 선발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내가 알기로는 다른 방법이란 없다. 당으로부터 확고하게 지지받고, 연속성을 유지할 권위를 갖춘 굳건한 지도부를 내부 투쟁 없이 건설한 사례는 없다. 언젠가 엥겔스는 내부 투쟁을 모든 정당 발전의 법칙이라고 썼다. 그것은 확실히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발전법칙이었다. 공산당만이 아니라, 그 정통 계승자인 트로츠키주의 운동도 초기에 그랬다.
지도력의 강화
경험, 투쟁, 내부갈등을 통해 폭넓은 권위를 갖고, 서로 협력해서 일할 줄 알며, 정치적 신념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지도부를 구성할 정도로 운동이 성장하면, 분파투쟁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분파투쟁은 더 드물어지고, 덜 파괴적이게 된다. 분파투쟁은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더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갖게 되고, 멤버들에게 더 유익하게 된다. 그런 지도부를 세우는 것은 분파투쟁을 줄이고, 때로는 중단시키는 강력한 힘이 된다.
우리는 결국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꽤 안정적인 지도부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지도부는 당 구성의 모순을 다시 반영해 특별한 구조를 띠었다. 이렇게 4~5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다가,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는 누구인지가 모두에게 아주 분명해졌다. 그들은 1919~20년에 지도자였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초기 지도자 중 극소수만 이 투쟁에서 살아남았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결국 전면에 서게 된 지도부는 하나의 단일그룹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이것이 그 역사에서 아주 흥미 있는 면이다). 당 자체가 동질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 전체에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단일 지도부 대신, 당 내 모순을 반영해 여러 분파의 지도자들이 당의 중요 지도자들이 됐다. 1923년에 주로 농민노동자운동 내 모험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분파투쟁이 시작됐다. 그 다음에 이 분파투쟁은 미국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 노조 활동 방법 등 실제 활동의 모든 문제들로 확산됐다. 장기간에 걸친 이 투쟁은 당의 사회적 구성에 존재하는 모순, 그룹들의 서로 다른 기원 및 배경을 분명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루덴버그, 러브스톤, 페퍼 등 당시 다수파에 맞서 포스터와 내가 그 투쟁을 조직했다. 우리 그룹은 노조에 기반을 둔 노동자계급 분파라는 점이 곧 명백해졌다. 노조 활동가들, 경험 많은 미국 노동자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더 미국화한 외국인의 대부분(사실상 전부)이 우리를 지지했다.
페퍼-루덴버그-러브스톤 그룹은 지식인 대부분과 덜 동화된 외국인 출신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2급 지도자들을 포함해 그 분파의 전형적 지도자들은 계급투쟁 경험이 없는 대학 청년과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매우 영리했다. 대체로 그들은 다른 분파 지도자들보다 책에 대한 지식이 분명히 더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장점을 어떻게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포함해 한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당의 통제권을 둘러싼 이 투쟁은 격렬했다. 어느 쪽도 제어장치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투쟁은 당시에 누가 다수인가와 관계없이 해마다 계속됐다. 때로는 중요해보이지 않은 이슈들에 초점을 맞춰 즉각 분파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의 전국본부를 어디에 둘 것인가가 그런 이슈였다. 우리 분파는 시카고에 두자고 했다. 다른 분파는 뉴욕에 두자고 했다. 우리는 그 문제로 싸웠다. 하지만 쓸데없는 참견자들이 묘사하듯이,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국본부를 시카고로 옮기면, 당이 더 많은 미국 지향성을 가질 수 있고, 광산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미국 노동자운동의 중심부에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당을 노동자화하고, 미국화하기를 원했다. 뉴욕에 본부를 두자는 그들의 주장도 마찬가지로 정치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 뉴욕은 당 안에서 소부르주아 요소가 강했다. 그곳에서는 지식인들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그곳이 더 편했다. 그래서 당 본부의 위치를 둘러싼 투쟁은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실제로 꽤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미래의 정직하고 객관적인 역사가들은 아마도 이렇게 오랫동안 벌어진 분파투쟁을 전반적으로 당 내 소부르주아 경향과 노동자계급 경향 사이의 투쟁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그리고 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노동자계급 경향이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도록 투쟁을 발전시킬 충분히 명료한 강령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당시에 우리 모두가 실제로는 신참내기들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볼셰비즘 사상을 겨우 알기 시작했을 뿐이다(아주 잘 알지는 못했다). 우리는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다. 우리를 가르칠 지도자가 없었다.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면서 투쟁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비틀거린 노동자계급 경향은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 그리고 투쟁의 열기 속에서 여러 모순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 견해로는, 이 분파 운동의 정수는 역사적으로 올바르고 진보적이었다.
이 투쟁이 펼쳐지자, (포스터와 캐넌을 한편으로 하고, 루덴버그-러브스톤-페퍼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두 개의 주요 분파가 더 많은 분할을 낳았다. 정말로, 포스터-캐넌 분파 안에도 똑같이 계열이 존재했기 때문에, 분할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나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그룹은 공산주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원이었고, 포스터 분파보다 더 일찍 공산주의 원리를 채택했던 사람들이었다. 포스터파는 경험상 더 노동조합주의적이었고, 구상이 더 제한적이었으며, 이론적‧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덜 가졌다. 끝없이 계속되는 분파투쟁 과정에서, 이 암묵적 분할은 공식적 분할로 이어졌다. 그래서 당은 세 개 분파로 나눠졌다. 포스터 분파, 러브스톤 분파(루덴버그는 1927년에 죽었다) 그리고 캐넌 분파. 이런 분할은 1928년에 그들이 나를 당에서 내쫓을 때까지 지속됐다.
이 모든 분파는 자신들에게 완전히 명료하지 않은 사상을 위해 끝없이 싸웠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일정한 경향이 있었고, 원하는 바를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아주 정확하게 강령을 정식화할 정치경험도, 이론교육이나 지식도 없었다. 여러분은 몇 년 전에 우리가 사회주의노동자당 안에서 소부르주아 반대파와 벌인 큰 투쟁을 기억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 투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연구해서 알고 있다면, 옛 공산당 안에서 벌어진 소부르주아 분파와 노동자계급 분파 사이의 더 원시적인 투쟁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더 많이 경험했고, 몇몇 책을 읽었으며, 이론과 정치지식을 더 많이 얻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쟁점들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으며, 버넘과 샥트먼 등에 맞선 투쟁이 과거에 그랬듯이 무원칙한 다툼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내가 언급한 이 지도자들, 루덴버그, 러브스톤, 캐넌, 포스터 이 네 사람은 항상 당의 정치위원회 멤버들이었다. 이 4인이 항상 인정받고 권위를 지닌 당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분파 지도자였고 그 때문에 그들은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각 분파는 꽤 강하고, 비중도 서로 비슷했다. 그래서 어떤 분파도 분쇄하거나 제거할 수 없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 아주 많은 당의 유능한 활동가들이 각 분파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러브스톤파가 코민테른의 지원과 강요로 당의 다수파가 됐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노조 활동과 대중활동을 다른 분파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당 조직가, 저술가, 활동가들이 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고, 대체될 수 없었다. 포스터 분파는 특히 노조 분야에서 훨씬 더 강했다. 그들은 우리를 제거할 수 없었다. 우리를 제거하면 당이 혼란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은 사실상 세 영역으로 나뉘게 됐다. 각 분파는 거의 무제한의 권위를 갖고, 최소한의 통제를 받으면서 특정 분야들에서 작업할 자유를 확보했다. 포스터 분파는 노조활동의 전 영역을 장악했다. 우리는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를 조직해서 우리가 거의 원하는 대로 운영했다. 그때는 러브스톤파가 근소한 차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러브스톤파는 당 기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를 배제해도 될 정도로 통제권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힘의 특수한 균형이 수년 동안 계속됐다. 당연히 볼셰비즘 의미에서 실제로 중앙집중화된 당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 분파의 연합이었다. 정확히 보자면, 그것이 바로 당의 실제 모습이었다.
우리는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 어떤 분파도 다른 분파들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수 없었다. 어떤 분파도 당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분파도 당에서 실질적 다수를 장악하기 위해 자기 강령을 정식화할 정도로 유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착상태에 빠졌고, 장기간의 힘 빠지는 분파투쟁을 끝없이, 어떤 전망도 없이 벌였다. 당시는 맥 빠지게 하는 시절이었다. 정상적인 혁명가들에게 단지 몇 주, 몇 달이 아니라 몇 해를 분파투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은 극도로 짜증나는 것이었다. 분파투쟁을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다. 모든 분파에는 분파투쟁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어느 정도 건설적인 활동(시위, 파업 피켓라인[파업 사수대], 신문 배포 범위를 넓히는 것, 계급투쟁을 하다 감옥에 간 구속자를 돕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단조로운 일상활동이라 여기고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분파 간부회의를 소집하기만 하면, 그들은 항상 거기에 참가했고, 그것도 맨 앞자리에 앉았다.
모든 운동에는 어느 정도 비정상적인 형태가 있다. 우리한테는 그런 게 많았다. ‘내가 아는 분파투쟁 전문가’라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인물에 대해 강의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정치운동을 지도할 수 없다. 운동이 마침내 숨을 돌리고, 자기 길을 환하게 틔운 뒤에는, 분파투쟁 전문가들이 지도부에서 사라졌다. 우리 옛 분파들의 지도자들은 천사가 아니었다. 나는 그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 아주 거친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싸웠다. 하지만 그들이 이기적인 악당이었는가? 유진 라이온스, 맥스 이스트먼 같은 떠벌이들, 운동에서 비켜서 있다가 추상적 도덕의 잣대로 운동을 평가하는 잘난 체하는 자들은 그렇게 묘사한다.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기적 악당이 결코 아니었다. 뒤늦게 그 명제를 지지하고 나선 기틀로우조차도 처음부터 악당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들 중 일부가 처음부터 싹이 안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분파 지도자의 대다수는 이상주의적 목표와 이유로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는 나중에 타락한 스탈린주의자, 광신적 애국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의 타락은 오랫동안에 걸친 진화, 압력, 실망, 기만, 환상 등의 결과였다. 1919년의 어려운 시절에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 더 정확히 말하면 전쟁 시기에 러시아혁명 주위로 결집한 사람들이 1919년에 당을 만들었고, 비합법 시절의 박해와 탄압을 견뎌냈다. 그들은 태머니홀이나 공화당 그리고 여러분이 이름을 댈 수 있는 다른 어떤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정치운동의 정치가들보다도 도덕적 측면에서 훨씬 더 뛰어났다.
코민테른의 역할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더 경험 많고 권위 있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더라면 말이다. 우리가 해결하기엔 문제가 너무 컸다. 중앙에서 쫓겨난 지방 그룹들이 말다툼에 빠지고, 그것이 분파투쟁과 파벌 형성으로 발전하며, 경험 부족 때문에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일은 가장 선진적인 정치운동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난다. 만약 지혜롭고 공정하게 개입할 수 있는 현명하고, 정직하며 성숙한 전국 지도부가 있다면, 십중팔구 이런 지역적 교착상태는 결국 해결할 수 있고, 동지들은 공동활동의 토대를 찾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당시에 믿고 기대했던 코민테른과 러시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우리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분파 지도자들이 선했다. 모두가 재능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상적인 조건에서 코민테른이 올바르게 지도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면, 이 모든 분파의 지도자 대다수는 결국 함께했을 수 있으며, 단일 지도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 분파의 지도부가 뭉쳐서 더 경험 많은 국제 지도자들의 감독과 지도 아래 함께 활동했다면, 공산주의를 위한 강력한 힘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공산당은 크게 전진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기 위해 코민테른에 갔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지만, 문제의 실제 원천은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코민테른은 타락의 과정을 거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21년과 1922년에 우리는 노조 문제,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 문제에 대해 레닌, 트로츠키, 코민테른 전체로부터 정직하고 유능한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낡은 분파투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도움을 받는 대신, 우리가 코민테른의 타락 과정에, 코민테른의 스탈린주의화 초기과정에 빨려들어갔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지속시키기 위해 우리 당이나 다른 모든 당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온순한 스탈린주의 정당을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모든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들을 제거할 음모를 이미 꾸미고 있었다. 우리는 해마다 모스크바에 가곤 했다. ‘미국 문제’는 항상 논의 안건에 올랐다. 코민테른에는 ‘미국위원회’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위원회 전에 승부를 가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이 사람들을 이용하기가 조금 어렵겠다고 곧 확신했다. 십중팔구 그들은 모든 분파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스탈린의 도구 역할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분파를 빠르게 만들어낼 계획을 이미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갈 때마다 ‘우리가 올바른 입장을 갖고 있고, 우리 제안이 올바르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리가 도움과 지지를 좀 얻겠지’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매번 실망했다. 끔찍하게 실망스러웠다. 코민테른은 우리에 맞선 소부르주아 분파를 언제나 지지했다. 항상 그들은 초기에 다수파였던 노동자계급 분파에 타격을 줬다. 우리는 처음으로 1923년 대회에서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분명히 다수를 차지했다. 당원 대다수가 노동자계급 분파의 지도부를 원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했다. 포스터-캐넌 분파가 공식적으로 쪼개진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러브스톤파에 맞서 대부분의 시기에 하나의 블록을 형성했다. 매번 당원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기회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블록이 당의 제1 지도부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이 블록을 깨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몇 가지 이유로 한 그룹(캐넌 그룹)을 깨는 데 특히 혈안이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제거하려고 특별히 애를 썼다. 그들은 갑자기 1924년 코민테른 5차 대회까지 거슬러 올라가, 내가 했던 약간의 작은 실수를 결의안을 통해 비난했다(그때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당 지도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실수나 더 나쁜 실수를 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내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내가 직무를 유기했다고 몰아갔다.
그리고 해가 흘러 반트로츠키 캠페인이 증가했다. 모든 당에서 지도자의 자격은 이 캠페인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었다. 즉 모스크바가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트로츠키주의와 트로츠키를 누가 가장 소리 높여 비난했는가’였다. 우리는 러시아 당내 투쟁 사안에 대해 실질적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 우리는 공식 문서들, 모든 종류의 비난과 비방에 압도당했다. 문제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혀 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평당원들의 신뢰를 악용했다. 마찬가지로, 코민테른에 대한 당 지도자들의 신뢰도 거듭 악용했다. 매번 우리는 모스크바에 갔지만, 해결책을 갖고 돌아오지는 못했다. 표면상 당 내 ‘평화’를 위해 준비된 결의안을 갖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분파투쟁을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분파투쟁의 해결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떤 종류의 통일 선언에 사인하는 순간, 분파전쟁이 새롭게 불을 뿜었다. 냉소주의가 기층 당원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평화 합의’ 사인이 ‘이제 분파투쟁이 정말로 뜨거워질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는 것은 금언이 됐다. 적대적 분위기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모든 행보를 주의해야 하는 슬픈 상태가 됐다. 무언가에 동의할 때마다 의구심을 갖는 것이 필요해졌다. 아주 나쁜 도덕적 분위기가 안개처럼 당을 감싸기 시작했다.
많은 천박한 사람들은 코민테른의 타락이 우리 당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미국 운동의 비현실주의,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함 등의 증거로 인용한다. 그렇게 칭얼대는 사람들은 국제혁명조직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모스크바의 영향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국의 젊은 당이 러시아 지도부를 신뢰한 것은 러시아인들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완전히 정당했다. 당연히 러시아 당의 영향력과 권위는 국제 운동에서 다른 당보다 더 크다. 더 현명하고, 더 경험 많은 쪽이 초보자를 이끈다. 어떤 국제조직에서도 그럴 것이며, 그래야 한다.
인터내셔널에서 모든 당이 균등 발전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이 점을 트로츠키 생전에 제4인터내셔널에서 보았다.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의 모든 경험과 스탈린에 맞선 투쟁을 체화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권위와 명망은 제4인터내셔널에서 절대적으로 두드러졌다. 그의 말은 관료적 명령의 힘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도덕적 힘을 갖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곤란과 모든 분쟁에서 자주 드러났듯이, 그는 인내심, 지혜, 지식을 생산적이고 정직하게 쏟아냈고, 그의 개입을 요청하는 모든 당과 그룹을 항상 도왔다.
우리의 공산당 활동 경험은 우리의 모든 일상활동에서, 그리고 제4인터내셔널 안에서 경험이 덜한 그룹들과 교통하고, 관계를 맺는 모든 활동에서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로 우리 당이 더 폭넓은 정치적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트로츠키 동지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당보다 우리 당이 국제 운동에서 아마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만약 가까운 장래에 제4인터내셔널의 어느 지부가 혁명적 상황을 맞고, 혁명을 성공시킬 역량이 충분히 있다는 지도력을 보여준다면, 그 당이 자연스럽게 뚜렷한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국제 정치운동 불균등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코민테른 전반에 걸쳐 우리의 불행과 비극은 맑스주의 사상을 실제로 체화하고, 혁명을 실제로 완수한 러시아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러시아혁명에 맞선 반동과 러시아공산당의 관료적 타락 과정에서 떠밀려났다는 데 있다. 다른 나라 당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공산당은 위대한 투쟁의 복잡한 사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일국적 문제들만 생각하면서 어둠 속에서 싸웠다. 그것이 이 나라의 분파투쟁을 악화시켰다. 그 때문에 분파투쟁은 결국 무원칙한 말다툼과 주도권 다툼으로 타락해갔다. 오직 제때에 이해해 받아들인 국제 강령만이 미국의 젊은 공산당을 타락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1928년에야 그런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원래의 혁명적 목표를 위해 당의 다수를 구원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시작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당에 존재했던 세 분파는 각각 자체 진화과정을 거쳤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창립 간부는 전적으로 캐넌 분파 출신들이었다. 좌익반대파의 모든 지도자, 사실상 거의 모든 초기멤버는 우리 분파에서 나왔다. 러브스톤파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1929년 스탈린의 악랄한 법령에 따라 당에서 쫓겨났다. 러브스톤파는 1929년부터 1939년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민주적’ 전쟁의 지지자가 되어 부르주아 편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해체됐다. 포스터 분파와 다른 일부 분파들의 2급 지도자들은 스탈린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모든 독립성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잡탕처럼 한데 뭉쳤다. 그들은 2열과 3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실제 투사들이 내팽개쳐질 때까지 그늘 속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 뒤 심부름꾼 소년들이 자기 자리를 차지할 때가 왔다. 그들은 미국 공산당의 공식 지도자들, 급하게 만들어진 지도자들이 됐다. 그 다음에 그들은 또 자연스런 진화 과정을 거쳤다. 지금 그들은 사회애국주의 운동의 전위가 됐다.
우리의 현대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다른 곳이 아니라 공산당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기억해야 한다. 초기 공산당이 여러 부정적 측면을 갖고 있었고(나는 그에 대해 남김없이 다 얘기했다), 약했고, 서툴렀으며, 소아병을 앓았고,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그리고 분파투쟁과 그 궁극적 타락에 대해 뭐라고 회상하든, 이 나라 공산당의 타락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든 다음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혁명운동을 재건할 세력은 공산당에서 나왔다. 미국 공산당에서 제4인터내셔널 미국지부의 중핵이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라 공산주의 운동의 초기는 우리 것이라는 점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끈으로 초기 공산주의 운동과 묶여 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 탄압에 맞선 영웅적 투쟁, 희생, 오류, 분파투쟁, 퇴보에서부터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 운동을 결국 부활시킨 것 사이에는 부단한 연속성이 있다.
정의와 진실을 따라 우리는 초기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기초해 운동을 건설했다.
맑스주의냐 스탈린주의냐
지난 번 강연에서는 1927년까지의 미국 공산당 상황을 다뤘다. 맑스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근본적 투쟁이 이미 4년 동안 러시아 공산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코민테른의 다른 지부들에서도 같은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말 알지 못했다.
러시아 당에서 벌어진 대투쟁의 쟁점은 처음에는 아주 복잡한 러시아 문제들에 국한돼 있었다. 그런 쟁점 중 많은 것이 러시아 내부 문제들에 대해 거의 모르는 우리 미국인들에게는 새롭고 낯설었다. 그런 쟁점들은 심오한 이론적 성격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어쨌든 당시까지 우리는 정말로 진지한 이론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정보를 충분히 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 컸다. 우리는 러시아 반대파의 문서들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에게 감춰졌다. 우리는 진실을 듣지 못했다. 반대로, 우리한테는 체계적으로 거짓말과 왜곡을 일삼았고, 일방적으로 문서를 전달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왜 트로츠키주의 깃발을 처음부터 들지 않았는가? 운동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문제가 무엇인지 지금 그렇게 분명하다면, 왜 초기에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그런 큰 논쟁을 당 활동 방식에서 따로 떼어내 바라보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 단지 학생이나 논평가 또는 뒤로 빠져 있는 관찰자는 주의하거나 자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가 만약 의심하거나 불확실한 점을 느낀다면, 자기 의견을 완전히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당원은 그렇지 않다. 혁명가는 자기 시간, 에너지, 돈, 심지어는 자기 생명까지도 바칠 강령에 기초해 노동자들에게 당에 참여하라고 호소해야 할 책임을 떠맡는다. 그래서 당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새로운 강령을 공들여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양심상 기존 강령의 폐기를 호소할 수 없다. 불만과 의심은 강령이 아니다. 그런 것을 기초로 사람들을 조직할 수는 없다. 1939년, 러시아 문제로 우리가 논쟁을 시작했을 때 트로츠키가 샥트먼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 중 하나는 다음이었다. 우리 옛 강령의 올바름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샥트먼은 새 강령을 분명하게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기 의심을 무책임하게 표현해서 당이 시련을 겪게 했다. 당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트로츠키는 말했다. 의심으로 강령을 만들 수는 없다. 진지하고 책임 있는 혁명가들은 이러저러한 문제에 불만을 갖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당에 혼란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다른 강령, 당에 대한 다른 대안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러시아 좌익반대파
그것이 그 초기에 내가 공산당 안에서 견지했던 태도다. 나는 크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러시아 당 내 투쟁에 정열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부 투쟁이 점점 더 격해지고,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덱, 라코프스키처럼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대표한 러시아 좌익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증가하자, 내 마음 속에서 의심과 불만이 쌓여갔다. 공산당 안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렇게 의심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것은 나와 우리 분파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국 차원에서 문제를 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흔히 있는 잘못이었다. 제4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현대에 한 국가에 기초해서만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제강령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국제운동의 일국 지부를 세워야 한다.
지나가는 길에 말하자면,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브란틀러파, 런던 사무국 사람들, 삐베르 등 사이에서 벌어진 큰 논쟁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하고 다른 세력은 강력한 일국 정당들을 먼저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그들에 따르면, 여러 나라에서 아주 큰 대중정당을 만든 다음에만, 그 당들을 국제 조직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1929년 러시아에서 추방되고, 자유롭게 국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트로츠키는 국제강령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각 나라에 아무리 소수가 있을지라도, 국제강령에 기초해 사람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각국 지부들을 점차 세워나가야 한다. 역사는 이 논쟁에 판결을 내렸다. 일국 관점에서 시작했고, 국제 조직 문제를 제쳐두고 싶어했던 당들은 모두 난파당했다. 이런 국제 시대에 협소한 일국 강령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일국 정당들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오직 제4인터내셔널만 국제강령에서 출발함으로써 각 나라에서 살아남았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일국적 편협성
초기 공산당에서 우리는 이 원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일국 투쟁에 몰두해 있었다. 우리는 코민테른이 우리나라 문제에 도움을 주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코민테른의 다른 나라 문제들이나 코민테른 전체 문제들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런 치명적 오류, 이런 일국적 편협함 때문에 우리는 분파투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사태가 우리에게 아주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파도 분리하거나 당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코민테른에 충성스러웠다. 열광적으로 충성스러웠다. 그리고 코민테른을 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맥빠지는 국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고, 희망이 없어보였다. 분파들을 통합시킬 방법을 찾거나 한 분파가 우세해지거나 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
더 영리한 사람들 중 일부가, 아니 오히려 더 교활한 사람들 중 일부가 그리고 모스크바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코민테른으로부터 호의를 얻어서 자기 분파의 무게감을 높이는 방법은 정열적이고 적극적으로 반(反)트로츠키주의 투쟁에 나서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가 세계 모든 당에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캠페인을 벌이라고 명령했다. 1927년 가을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를 당에서 쫓아낸 뒤, 즉시 입장을 취하라고 모든 당에 요구했다. 만약 어떤 개인이나 그룹이든 ‘올바른’ 입장, 즉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제명에 찬성하지 않으면 모스크바가 보복할 것이라는 위협도 시사했다. ‘교육’ 운동도 지속했다. 러브스톤파가 반트로츠키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 시기에 코민테른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교육’ 운동을 조직했다. 회원 모임, 지부 모임, 분파 모임이 당 곳곳에서 열렸다. 이런 모임에는 적군 조직자[트로츠키]와 코민테른 의장[지노비에프]을 제명할 필요성에 대해 회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중앙위 대표들이 파견됐다.
러브스톤파처럼 빠르지도, 교활하지도 못했지만, 같은 의지를 갖고 있었던 포스터파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누가 가장 나은 반트로츠키주의자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러브스톤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들은 이 주제에 대해 연설하면서 살았다.
그것을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이런 캠페인 중 어떤 것에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상황을 예고했다. 나는 판에 박은 결의안에 찬성 투표했다. 이 점을 나는 후회한다. 하지만 나는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다. 내가 트로츠키주의자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러시아당과 코민테른 다수파의 방침에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만 쟁점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트로츠키주의 캠페인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러브스톤의 주요 부관이었던 버트램 울프는 가장 열렬한 트로츠키주의 박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러시아 농업 문제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두 시간이나 설명하곤 했다. 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도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러브스톤파와 포스터파가 이렇게 연설하고, 이 캠페인에 참가한 진짜 목적은 모스크바 권력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물어볼지 모르겠다. “왜 트로츠키에 대해 우호적으로 연설하지 않았는가?” 나는 강령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의심하고 있었고,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당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만약 그가 단지 논평가나 관찰자라면, 의심나는 것을 얘기해버리고 끝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지한 정당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면, 아무 말 안 해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은 침묵하는 것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월에 총회를 열었다. 그것이 유명한 1928년 2월 총회다. 이 총회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그리고 다른 모든 러시아 반대파들이 제명되고 몇 달 뒤에 열린 총회였다. 스탈린 관료제를 지지하기 위해 세계 당들을 동원하려는 대대적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총회에서 당 내 분파 쟁점들, 정세 평가, 노조 문제, 조직 문제로 싸우고 논쟁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로 격렬하게 싸웠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관심사였다. 그 다음에 우리는 마지막 안건인 러시아 문제를 다뤘다. 다수파인 러브스톤파의 보고자인 버트램 울프가 약 두 시간에 걸쳐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문제가 공개토론에 부쳐졌다. 러브스톤파와 포스터파의 각 멤버들이 한 명씩 차례로 나가 보고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명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제명에 동의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침묵했기 때문에 당연히 캐넌파의 다른 멤버들도 말하기가 좀 곤란했다. 그들은 그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일종의 압력을 행사했다. 나는 그날 내가 홀 뒤쪽에서 어떻게 앉아있었는지 기억난다. 기분 나쁘고, 씁쓸하며 혼란스러웠다. 뭔가 감춰진 게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빌 던은 당시에 정치위원회 멤버였고, 가장 가까운 내 동료였는데, 다른 두 명과 함께 나한테 왔다.
“짐, 동지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해야 해요. 그것은 러시아 문제예요. 동지가 이 보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 분파를 박살내버릴 거예요. 일어나서 보고에 찬성한다고 몇 마디만 해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볼 때 ‘현명한 정책’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볼 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미래를 예측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문제에 대해 내가 느낀 기분이었고, 완고한 개인적 느낌이었을 뿐이다. 우리한테는 제대로 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정말 몰랐다. 바로 그때(1927년), 러시아 당 내 논쟁이 중국 혁명과 영국·러시아 위원회[영러 위원회]라는 국제 문제들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당의 거의 모든 멤버가 중국 혁명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다. 왜냐면 그때 이후 아주 많은 자료들이 출판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 혁명의 교훈에 대해 젊은 동지들에게 교육해왔다. 하지만 1927년에 우리 미국인들은 중국 혁명에 대해 전혀 몰랐다. 중국은 너무 멀었다. 우리는 러시아 반대파의 테제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식민지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중국 혁명에 관한 심오한 이론적 문제들과 그에 따른 논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영러위원회 문제는 나한테 좀더 명쾌해 보였다. 그것은 영러위원회 건설을 둘러싸고 러시아 반대파와 스탈린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큰 투쟁 문제였다. 그 위원회는 영국과 러시아 노조 활동가들의 위원회로서 영국에서 독립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대체했다. 이 정책은 1926년 영국 총파업이라는 결정적 순간에 영국 공산당의 독자적 활동을 압살했다. 아주 우연히, 그해 여름에, 나는 그 문제에 대한 러시아 반대파의 문건 중 하나를 봤다. 그 글은 나한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적어도 영러위원회 문제에서는 반대파가 옳다고 느꼈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스탈린주의자들이 묘사하듯 반혁명분자들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1928년 2월 총회 이후 나는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해왔던 전국순회에 나섰다. 나는 해마다 또는 2년마다 진짜 미국의 숨결을 느끼고,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해안가를 따라 순회하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여러분은 뉴욕에 있는 당 지도자 일부로부터 여러 비현실적인 견해와 오류, 많은 편협한 생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맨해튼 섬에서 한평생을 살았고, 이 거대한 다양성의 나라를 정말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1928년에 넉 달 동안 전국을 순회했다.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분파투쟁의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대중운동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나는 러시아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기회를 얻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 던은 나한테 다음 사실을 기억하게 해줬다. 내가 태평양연안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니애폴리스에 들렀을 때, 그와 스코글런드 동지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의 제명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지도자들을 비난한다면 나는 누구겠는가?”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내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의 제명에 아주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몇 달 뒤 공개투쟁이 벌어졌을 때 그 얘기를 나한테 들려주었다.
코민테른 6차 세계대회
1928년 늦봄과 이른 여름에, 코민테른 6차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우리는 그런 경우에는 항상 그랬듯이 모든 분파를 대표하는 대규모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떠나보냈다.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나는 거기에 갔을 때 국제운동의 문제들에 몰두하지 못했다. 한 지부의 대표자들로서 우리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와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말이다. 대신 우리 모두는 주로 미국 당 안의 작은 투쟁에 어느 정도 매몰돼 있었다. 여기에서 편안하게 상대방을 요리하기 위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보려고 세계대회에 갔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사실상 모든 사람의 태도였다. 세계대회를 향해 떠났을 때, 나는 러시아문제, 좌익반대파와의 논쟁에 대해 해명을 명쾌하게 들을 수 있다는 어떤 희망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는 반대파가 완전히 싹쓸이당한 것처럼 보였다. 지도자들은 쫓겨났다.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로 추방당했다. 전 세계에서 지지자들이 당에서 내쫓겼다. 문제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그래도 그 문제가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 문제로 나는 너무 괴로워서, 모스크바에서 분파투쟁을 할 때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분파투쟁을 계속했다. 우리는 즉시 간부회의에 우리 대표들을 배치하고, 서로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곳의 위원회 앞에서 서로 고발하고, 끝없이 논쟁했다. 나는 그런 일에 어느 정도 시무룩했다. 바로 그 즈음에 그들이 위원회들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각 대표단의 지도자들이 대회의 여러 위원회들에 참가하도록 배정됐다. 노조위원회, 정치위원회, 조직위원회 등에 배정됐다. 거기에 강령위원회도 있었다. 6차 대회는 최초로 강령을, 그것도 완결된 코민테른 강령을 채택하기로 돼 있었다. 코민테른은 1919년에 만들어졌다. 1928년에 이르기까지 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강령을 완성하지 못했다. 코민테른 초기에 강령 문제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자들이 강령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강령을 정성들여 가다듬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1919년에 몇 가지 기본 결의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1920년, 21년, 22년에 또 다른 결의안들을 채택했다. 4차 대회 때 그들은 강령토론을 시작했다. 5차 대회는 강령 작업을 더 진척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1928년에 이르게 됐고, 우리는 부하린과 스탈린이 썼다는 강령 초안을 받게 됐다.
나는 강령위원회에 배정됐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다른 분파 지도자들이 강령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령은 부하린에게 맡겨라. 우리는 그런 문제로 골치 아프고 싶지 않다. 우리는 우리 분파투쟁을 결정할 정치위원회에 참가하고 싶다. 또는 우리를 괴롭히는 자잘하고 갑갑한 노조문제들을 결정할 노조위원회나 다른 어떤 실천적 위원회에 참가하고 싶다.”
그것이 미국 대표단의 일반적 정서였다. 나는 강령위원회에 떠밀려졌다. 그것은 일종의 실속 없는 명예였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강령위원회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캐넌과 스펙터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다
하지만 나를 강령위원회에 배정한 것은 그들의 큰 잘못이었다. 포스터, 러브스톤, 다른 분파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도 골치가 꽤 아팠을 것이다. 왜냐면 알마아타로 추방됐고, 러시아당과 코민테른에서 제명된 트로츠키가 대회에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볼 수 있듯이, 트로츠키는 당이 제명했다고 해서 곧바로 일어나 제 발로 걸어나가지 않았다. 그는 제명당한 뒤 곧 돌아왔다. 코민테른 6차 대회 소집이 그에게는 첫 번째 기회였다. 그는 이 대회에 자기 사건을 설명하는 문서를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부하린과 스탈린의 강령초안을 비판하는 글을 제출해 이론적으로 엄청나게 기여했다. 트로츠키가 쓴 문서의 제목은 ‘코민테른 강령 초안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었다. 원래 트로츠키의 이 문서는 관료적으로 은폐될 뻔했으나, 모크스바 조직이 조금 실수하는 바람에, 코민테른 번역실에 전달됐다. 그 번역실에는 열두 명 이상의 번역가와 속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직 번역과 속기 일만 했다. 그들은 트로츠키 문서를 집어들고 번역한 다음, 대표단장들과 강령위원회 대의원들에게 배포했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 영어번역본이 내 무릎에 놓였다! 캐나다 당 대표자인 모리스 스펙터도 나와 약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령위원회에 배정됐고, 트로츠키 강령 번역본을 받았다. 우리는 간부회의와 대회 회의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 문서를 읽고 연구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모리스 스펙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의심을 해결했다. 맑스주의 진실이 트로츠키 편에 있다는 것이 대낮같이 분명했다. 나와 스펙터는 고국에 돌아가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 투쟁을 벌이자고 거기에서 약속했다.
우리는 이미 철저히 확신하고 있었지만, 모스크바 대회에서 투쟁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 문서를 읽은 날부터 나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스스로를 트로츠키의 제자로 여겼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투쟁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망하는 몇몇 순수주의자들은 이렇게 다시 요구할지도 모른다. “왜 6차 대회 때 연단에 올라가 트로츠키를 옹호한다고 발언하지 않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치활동을 하는가의 문제다. 코민테른은 이미 꽤 많이 스탈린주의화 됐다. 대회는 통제되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완전한 입장을 대회에서 밝혔더라면, 아마 고국에서 극심하게 비난받고 고립될 때까지 모스크바 감옥에서 갇혀 지냈을 것이다. 나중에 러브스톤은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이 모스크바의 덫에 걸렸다. 트로츠키 문서를 본 나의 의무, 나의 정치적 임무는 우리 당 안에서 러시아 반대파를 지지할 토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우선 고국에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스탈린주의화한 코민테른에서 침묵을 지켰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직이 미덕이다. 하지만 부도덕한 적을 상대할 때 정직은 바보짓이다.
그때 우리가 우리 감정을 아주 철저하게 숨기지는 못했다. 나는 특히 점점 더 트로츠키주의를 ‘만지작거린다’고 여겨졌다. 기틀로우는 회개하는, 애처로운 대필 서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소련 비밀경찰] 게페우는 캐넌이 모스크바에서 했던 활동을 조사했고, 러시아인들과 대화하면서 캐넌이 트로츠키주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고 코민테른에 보고했다.”
그들은 나를 의심했다. 하지만 너무 거칠게 다루는 것은 주저했다. 그들은 아마도 나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공공연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개투쟁으로 가면 내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그들이 가정할 만도 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왔다(내 생각으로는 그때가 9월이었다). 미국 당 내 분파투쟁에 관한 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러브스톤은 모스크바 투쟁에서 이익을 약간 얻었다. 하지만 당시에 스탈린은 나중에 러브스톤파를 제거할 토대가 된 몇 가지 단서를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나는 트로츠키가 쓴 강령초안 비판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몰래 가져왔다.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즉시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조직하는 확고한 임무에 착수했다.
여러분은 그 일이 아주 간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진행된 것이다. 트로츠키는 모든 코민테른 당에서, 그리고 6차 대회에서 다시 한 번 더 반혁명분자라고 비난받고 있었다. 당에서 트로츠키의 공공연한 지지자라고 알려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 전체가 트로츠키주의에 엄격하게 반대했다. 그때 당은 질문하고 공정하게 토론할 수 있는 민주적 조직이 더 이상 아니었다.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를 옹호한다고 선언하면, 반혁명 배신자라고 비난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떤 토론도 없이 곧바로 제명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충돌이 오기 전에 비밀스럽게 새로운 분파를 조직해야 했다. 크든 작든 이 분파는 제명당할 것이며, 새로운 운동을 만들기 위해 스탈린주의자들과 전 세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나는 임무가 막중하다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환상을 품었다면, 결과에 너무 실망해서 파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하게 개별 활동가들을 찾아서, 본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로즈 카스너는 첫 번째로 나의 확고한 지지자가 됐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에서 나와 함께 활동했고, 정치위원회 멤버는 아니었지만 전국위원회 멤버였던 샥트먼과 에이번은 위대한 새 시도를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몇 사람도 결의했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활동했지만, 꽤 잘 해나가서 여기저기에서 약간씩 전진했다. 캐넌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공공연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당 상황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내가 언급했듯이 당은 세 분파로 쪼개져 있었다. 하지만 포스터파와 캐넌파는 블록을 형성해서 함께 활동했고, 당시에는 공동 간부회의도 열고 있었다. 이것이 포스터파를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만약 그들이 감춰진 트로츠키주의를 폭로하고 거기에 맞서 정열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스탈린의 동조와 지지를 잃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우리를 거칠게 대해 우리 지지를 잃으면, 다가오는 대회에서 다수파 지위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은 망설여서 곤란에 빠졌고, 우리는 그들의 모순을 충분히 이용했다.
우리의 임무는 어려웠다. 우리한테는 트로츠키의 문서가 한 부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복사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한테는 속기사가 없었다. 타자기도 없었다. 등사 기계도 없었다. 돈도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의 깊게 선택한 사람을 만나, 충분히 흥미를 느끼게 만든 다음, 집에 가서 그 문서를 읽게 하는 것이었다. 길고 고된 과정이었다. 우리는 몇 사람을 획득했고, 그들은 복음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을 도왔다.
‘재판’ 그리고 캐넌, 샥트먼, 에이번의 추방
결국 한 달쯤 뒤에, 우리 동지 중 한 명이 조금 경솔하게 행동해서 우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터-캐넌 분파의 합동 간부회의에서 일찍이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다. 포스터파는 심문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얘기를 들었으므로 설명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크게 걱정하고 있고, 아직 결단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공세를 취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심문하는 것은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당에서 내 입장은 꽤 분명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의심하다니 화가 난다.”
우리는 그렇게 엄포를 놓고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그 한 주 동안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몇 사람을 우리쪽으로 조직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심문을 계속해보려고 또 다른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해서웨이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이른바 레닌 학교에 다녔다. 사실 그것은 스탈린 학교였다. 그는 스탈린 학교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서 ‘트로츠키주의’를 어떻게 고발해야 하는지를 지방 제화공들보다 훨씬 더 잘 알았다. 그는, 고발하는 방법은 “이 간부회의는 트로츠키주의가 반혁명적이라고 규탄한다”는 안을 제출해, 모두가 그 안에 동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해 “트로츠키주의 문제는 오래 전에 결정됐으므로, 이 문제를 다시 꺼내드는 것은 의미가 전혀 없다”고 반대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한 형식적 전술이었다. 그것은 경찰처럼 행동하려는 스탈린 학교 졸업생을 대하기 위해 필요한 전술이었다.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네다섯 시간 논쟁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그들이 ‘트로츠키주의’에 단호하게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판을 잃는다면 모스크바의 지지를 잃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그들이 우리와 분리한다면, 미국 공산당 안에서 다수파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몹시 다수파가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캐넌 같은 똑똑한 친구가 결국 제정신을 차리고, 트로츠키를 방어하겠다는 무익한 투쟁에 이렇게 뒤늦게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키워왔다(오, 어떻게 키운 희망인가!).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직접 얘기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여지를 그들에게 약간 주었다. 결정은 다시 미뤄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2주를 벌었다. 결국 포스터파는 사안이 너무 뜨거워지고 있다고 자기들끼리 결정했다. 캐넌, 샥트먼, 에이번이 당원들을 트로츠키주의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소문을 점점 더 많이 듣고 있었다. 포스터파는 러브스톤파가 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자신들을 공범으로 고발할까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동 간부회의에서 우리를 허둥지둥 쫓아냈다. 그리고 정치위원회 전에 우리를 고발했다.
당을 향한 호소
우리는 정치위원회와 중앙조정위원회의 합동회의 전에 재판을 받았다. 우리는 <투사> 초기 호들에서 그 재판을 다뤘다. 당연히 그것은 불법 재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연설하고, 포스터파의 증인을 반대심문할 충분한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는 당 내 민주주의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정치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브스톤파가 포스터파와 타협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권리’를 준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우리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유를 충분히 이용했다. 재판은 날마다 계속됐다. 점점 더 많은 당 지도자들과 간부들이 참석하도록 초대됐다. 결국 청중이 100명가량 됐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의 증인을 반대심문하고, 포스터파 사람들의 명예를 떨어뜨리거나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정도로만 대응했다. 결국, 우리가 그 일에 지쳤을 때,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가 당 전체로 퍼졌을 때, 우리는 싸우기로 결정했다. 나는 조용하고, 다소 겁먹은 당 간부들로 이뤄진 청중들에게 모든 원칙적 문제에서 우리가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를 100% 지지한다는 선언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노선에 따라 투쟁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밝혔다. 정치위원회와 중앙조정위원회의 합동회의가 우리를 제명했다.
<투사>를 발행하다
바로 다음날 우리는 등사판으로 인쇄된 성명서를 당 전체에 배포했다. 우리는 제명을 예상했다. 우리는 제명에 대해 이미 준비가 돼 있었고, 그래서 곧바로 맞받아쳤다. 약 1주일 뒤, 우리가 <투사> 창간호를 발행해 한 방 먹이자 그들은 크게 질겁했다. 신문 기사는 준비돼 있었고, 우리가 재판을 끌 때 인쇄업자와 인쇄 협의를 했다. 우리는 1928년 10월 27일에 제명됐다. <투사>는 그 다음 주에 11월호로 나왔다.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경축하고, 우리 강령을 소개하는 기사 등이 실렸다. 그래서 미국 트로츠키주의를 위한 공개 투쟁을 시작했다.
확실히 우리가 처음부터 아주 밝은 전망을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른 입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첫 몇 주 동안 꾸준히 세를 불려나갔고, 처음부터 확고하게 설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이나마이트 폭탄으로 당 내 무원칙한 분파주의 더미를 폭파시켰다. 우리는 국제주의의 원칙적 강령에 기초를 둠으로써 미국 당 분파들의 모든 낡은 오류와 실수로부터 단번에 벗어났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싸우고 있는지 확신했다. 낡은 말다툼 속에서는 그렇게 크게 보였던 모든 작은 조직적 술수들을 낡은 코트 버리듯 던져버렸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진짜 볼셰비즘 운동을, 그리고 미국 공산주의의 재건투쟁을 시작했다.
숫자 측면에서 보면 미래가 아주 밝은 투쟁은 아니었다. 선언에 서명한 우리 세 사람, 에이번, 샥트먼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 새 당을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려고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갈 때 약간 외로움을 느꼈다. 우리 셋 모두는 국제노동자방어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월급도 못 받고 거기에서 즉시 쫓겨났다. 우리한테는 돈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어디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어떻게 인쇄비를 치를지 모르는 상태에서 <투사> 창간호를 계획했다. 하지만 우리는 창간호에 대해서는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인쇄업자한테 약속받았다. 우리는 시카고 친구 몇 명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들이 돈을 좀 줘서 신문을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신문을 한 달에 두 번 발행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분파가 성장하다
당에서 쫓겨난 직후, 우리는 1~2년 전에 분파투쟁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당에서 제명됐던 헝가리 동지들의 그룹을 발견했다. 우리와 별도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암토르그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몇몇 러시아 반대파들과 접촉해서 트로츠키주의에 확신을 갖게 됐다. 그들은 확실히 우리에게 백만 대군처럼 보였다. 우리는 뉴욕에 있는 작은 이탈리아 반대파 그룹도 찾아냈다. 그들은 보르디가를 따랐는데, 정말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우리와 함께 활동했다. 우리는 꽤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우리는 비난에 전투적으로 맞서고, <투사>를 통해 트로츠키의 강령 초안 비판 등 러시아 반대파의 새로운 글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칙에 입각한 명확한 강령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를 움켜쥔 분파가 곧 확고하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소규모 분파였지만, 이 그룹은 아주 확신에 차고 열정적이고 단호한 분파였다. 우리는 전국에서 회원을 새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대수확을 거뒀다. 미니애폴리스는 팀스터 파업투쟁에서만이 아니라 미국 트로츠키주의 건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시카고에서도 지지자들을 조직했다.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크게 불리했다. 당에서 제명당하기 전에 뉴욕 밖의 당원들과 별로 소통하지 못했다. 공산당의 대다수 동지들은 우리가 제명당했다는 소식을 통해 우리 입장을 처음 알았다. 당 지도부의 조잡한 전술이 우리를 크게 도왔다. 그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든 위원회와 지부에 캐넌, 샥트먼, 에이번에 대한 제명을 승인하라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질문하거나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하고 곧 쫓아냈다. 그것이 우리한테 큰 도움이 됐다. 그들은 그런 동지들을 우리가 최소한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처지로 곧장 내몰았다. 우리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좋은 친구들이 있는 미니애폴리스에서 러브스톤파의 정치위원이 그들을 회의로 불러들여 우리의 제명을 승인하는 안에 즉시 투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거부했다. “우리는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이 동지들의 말을 듣고 싶다.” 그들은 즉시 쫓겨났고, 우리와 소통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투사> 등 문서를 주었다. 결국 우리 제명을 승인하지 않아 쫓겨난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한테 동조했고, 그들 대부분이 우리와 함께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것이 단지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문제는 맑스주의 강령이다. 우리가 만약 관료주의에 대한 반감만 가지고 사람들을 조직하려 했다면, 우리는 회원을 더 많이 조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관료주의는 불충분한 기초였다. 우리는 민주주의 문제를 이용해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귀를 기울이게 한 다음, 모든 정치문제에서 트로츠키주의가 옳다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입장을 밝히고, 제명당한 것이 모든 당원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였다고 수년 동안 당원들은 주입받았다. 그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제명당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무력한 당원들의 마음은 트로츠키와 러시아 반대파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그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듯, 세 명의 당 지도자가 자신들은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포하고 제명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당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이렇게 얘기했다. “모든 원칙적 문제에서 트로츠키가 옳다. 우리는 그것을 동지에게 입증해보이겠다.” 그런 상황에 많은 동지들이 맞닥뜨렸다. 우리 제명을 승인하지 않아 쫓겨난 사람 대부분은 당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에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반혁명적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료들이 그들을 어리석게 내쫓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얘기하고, 토론하며, 그들에게 문건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분파를 최초로 공고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 시절엔 모든 개인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보였다. 처음 분파활동을 시작할 때 네 명뿐이었다면, 다섯 번째 사람이 올 경우 25% 증가한 셈이 된다. 전설에 따르면,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회주의노동당이 텍사스 주에서 선거 득표수가 2배로 뛰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발표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평상시의 1% 대신에 2%를 얻었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최초로 사람을 조직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쫓겨난 지 얼마 안 돼, 당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을 때, 어느 날 누군가 내 방문을 노크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모건스턴이 온 것이다. 그는 젊지만 분파투쟁에서 ‘캐넌파’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동지가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해서 제명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을 수 없다. 진짜 내막을 알고 싶다.” 당시에는 같은 분파 사람한테서만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귀중한 트로츠키 글을 뒷방의 숨겨둔 장소에서 꺼내 그에게 건넨 것을 기억한다. 그는 침대에 앉아, 긴 ‘강령초안 비판’(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고개를 들지도 않고 읽었다. 다 읽고 난 뒤, 그는 결단했다. 우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중핵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개별활동가들을 조직했다. 트로츠키 사상은 우리의 무기였다. 우리는 <투사>에 ‘강령초안 비판’을 시리즈로 실었다. 우리한테는 ‘강령초안 비판’이 한 부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을 팜플렛 형태로 발간할 수 있었다. 그 분량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등사판으로 인쇄할 수 없었다. 우리한테는 등사기가 없었고, 타이핑할 사람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돈은 심각한 문제였다. 우리 모두 당 직책을 박탈당했고, 어떤 수입도 없었다. 우리는 정치투쟁하느라 너무 바빠 생계활동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우리에겐 정치활동 자금도 문제였다. 우리는 사무실을 낼 수 없었다. 1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3번가에 허술한, 창문에서 윙윙 소리가 나는 사무실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2년째 됐을 때, 우리는 최초로 등사기를 구했고, 그 다음부터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국 공산주의의 부흥
지난주에 우리는 결국 스탈린주의화한 공산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만들고 미국 공산주의 재건을 위한 위대한 역사적 투쟁을 시작했다는 데에 이르렀다. 우리 행동은 미국운동 상황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기운 빠지게 하고, 운동을 퇴보시키는 일국적 분파투쟁을 국제적 목적을 지닌 위대한 역사적 투쟁으로 사실상 한 방에 탈바꿈시켰다. 이런 급격한 전환을 통해, 사상이, 이 경우에는 진실한 맑스주의 사상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상은 이중의 장애물을 뚫고 나아갔다. 우선 내가 앞 장들에서 간단하게 설명한, 오랫동안 질질 끈 국내 분파투쟁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 우리는 사소한 조직문제에 빠져 있었고, 편협한 일국주의 관점 때문에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상황을 해결할 수 없는 듯 보였다. 다른 한편, 멀리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레닌주의 반대파가 조직적으로 완전히 궤멸돼버렸다. 지도자들은 당에서 쫓겨나고, 입에 재갈이 물리고, 불법화되고, 기소당했다. 트로츠키는 멀리 알마아타로 추방당했다. 전 세계에서 그를 지지하는 단위들은 흩어져 있었고, 조직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일련의 국면을 거쳐, 상황이 바로잡혔다. 모든 것이 적절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트로츠키가 알마아타에서 맑스주의 문서 하나를 코민테른 6차 대회에 보냈다. 비서 기구의 빈틈을 뚫고 그 문서가 소수 대표자들에게, 특히 미국 당 대표자 한 명과 캐나다 당 대표자 한 명에게 갔다. 맑스주의 사상의 천하무적 같은 힘을 보여준 이 문서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들에게 떨어졌다. 그래서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듯이 빠르고 커다란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하룻밤 사이에 투쟁의 전체 그림, 전체 전망이 바뀌었다. 공식적으로는 죽었다고 선언된 트로츠키주의가 국제 무대에서 부활했고, 새로운 희망, 새로운 열정,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미국 당 언론이 우리를 맹렬하게 비난했고, 그 기사를 모스크바의 프라우다를 비롯해 전 세계 스탈린주의 언론이 다시 실었다. 감옥과 망명지에 있던 러시아 반대파 활동가들이, 빠르든 늦든 도착하는 신문을 보고, 미국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있고 저항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챘다. 반대파 투쟁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바다 건너 미국에서 신병들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됐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힘과 비중 때문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은 그만큼 더 중요하고 비중이 컸다.
내가 말했듯이,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라는 작은 아시아 마을에 고립돼 있었다. [좌익반대파들의] 세계운동은 가라앉아 있고, 지도자가 없으며, 탄압받고, 고립되고,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머나먼 미국에서도 반대파가 등장해 투쟁하고 있다는 이런 고무적 소식이 들려오자, 반대파 그룹들의 작은 신문, 기관지들이 다시 활력을 얻었다. 우리에게 가장 고무적이었던 것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러시아 동지들이 우리 목소리를 확실히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1928년에 우리가 펼친 역사적 투쟁에서 가장 기뻤던 측면 중 하나로 항상 다음을 생각해왔다. 모든 감옥과 망명지에 있는 러시아 동지들이 우리 투쟁 소식을 듣고, 끈질기게 버틸 새로운 희망과 에너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 부딪칠지에 대해 꽤 분명한 통찰력을 갖고 투쟁을 시작했다. 우리는 적절한 생각이나 준비 없이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큰 곤란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예측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적 희망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 우리 신문 모든 호에서, 모든 성명서에서 우리는 투쟁의 근본성격을 강조했다. 우리 강령의 올바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훨씬 멀리 내다봐야 하고,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며, 사태가 더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신문인 <투사>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투사>는 등사기로 인쇄해 몰래 배포하는 신문이 아니었다. 많은 작은 그룹은 그 정도에 만족한다. <투사>는 보통 크기의 신문이었다. 우리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우리 세 사람(에이번, 샥트먼, 캐넌)을 무시하듯이 ‘군대 없는 세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 명칭은 곧 유명해졌다. 우리는 그 명칭이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인정해야 했다. 우리에게 군대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강령을 갖고 있었고, 이 강령 덕분에 우리가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편지를 통한 선전
우리는 편지 쓰기를 정력적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흥미를 느끼는 누군가에 대해 들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장문의 편지를 쓰곤 했다. 우리의 선전선동 활동의 성격은 필연적으로 바뀌었다. 과거에 우리는, 특히 나는, 꽤 많은 청중에게 연설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제명당하기 얼마 전에 나는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전국을 순회했다.
이제 우리는 개인들에게 말해야 했다. 우리의 선전활동은 주로 공산당에서 또는 공산당 근처에서 우리 사상에 흥미를 느낄 만한 고립된 개인들의 이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날 약속을 잡고, 한 개인에게 몇 시간씩 얘기하고, 한 사람을 조직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원칙적 입장을 긴 편지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몇 백 혹은 몇 십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조직해야 했다.
캐나다의 스펙터
미국 운동에서 폭발이 발생하자마자 캐나다에서 스펙터가 제몫을 해냈다. 똑같은 일이 거기에서도 벌어졌다. 상당한 규모의 캐나다 그룹이 만들어져 우리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나왔던 동지들이 시카고,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필라델피아에서 우리 깃발로 모여들었다. 대체로 그룹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시카고가 20~30명 규모로 시작했다. 미니애폴리스도 비슷했다. 캔자스시티에는 3~4명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에는 경외할 만한 모건스턴과 굿맨, 이렇게 2명이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혼자서 우리 활동을 했다. 뉴욕 여기저기에서 몇 명을 건졌다. 클리블랜드, 세인트루이스, 일리노이 남부의 광산에서도 사람을 조직했다. 초기에 이 정도의 조직 연결망을 갖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척, 비방, 깡패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