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
Ⅰ. 박근혜 · 최순실 정국과 노동계급의 대응
(2016년 11월 4일)
Ⅱ. 박근혜 퇴진! 노동자 정부!
(2016년 11월 19일)
Ⅲ. 박근혜 퇴진투쟁과 과제
(2016년 12월 10일)
Ⅳ. 박근혜 퇴진투쟁에 담긴 사회동학과 노동계급의 원칙
(2017년 3월 14일)
작년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파면을 확정하기까지, 20주에 걸쳐 하루 최대 2백만 연인원 천오백만 이상이 결집된 인민의 에너지는 1987년 이래 지난 30년간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회격동이 시작된 직후부터 탄핵 인용 직후까지 2016년 11월 4일, 11월 19일, 12월 10일 그리고 2017년 3월 14일 등 총 4회에 걸쳐 선전물을 발표하였다. 앞 3회는 각각 3천~5천부 가량 인쇄되어 현장에서 배포되었다. 마지막 4번째는, 박근혜 탄핵 이후 발표된 우리 입장에 대한 비판에 임하여, 반비판하는 형식으로 작성된 것으로 온라인으로만 발표되었다.
이 네 차례의 선전물은 모든 사회격동이 그렇듯 빠른 템포로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던 박근혜 퇴진운동 전개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 역관계에 반영된 운동의 성격과 문제점 그리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다.
11월 4일, 2차 범국민행동 하루 전에 발표된 첫 선전물은, 운동이 상승되던 도입부에서, 운동의 폭발적 성격과 그 원인 그리고 지배계급이 유도하는 방향(‘꼬리 자르기’ ‘야권 연대’ ‘계급 협조’)과 노동계급의 대응 원칙(계급적 독립과 자유주의 자본주의 정치인에 대한 환상 배격)을 밝힌 글이다.
11월 19일 4차 범국민행동에 맞춰 발표된 2차 선전물은, 그 전주 11월 12일에 서울에만 백만이 결집하면서 운동이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을 넘은 정세를 반영했다. 11월 12일 3차 집회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지배계급 내 ‘친박 일파’와 ‘미일 제국주의’ 등이 정국을 대응하는 태도와 변화 그리고 그 이유 등을 분석했다.
12월 10일 7차 범국민행동에 3차 선전물이 배포되었다. 2주 사이 지배엘리트의 정국 유도방향인 ‘탄핵을 통한 퇴진’이 야3당에 이어 퇴진행동에게마저 기어이 수용되면서 지배계급 입장의 ‘연착륙’ 계획이 결국 실현되고 말았다. 만일 분노한 인민이 박근혜를 직접 끌어내렸다면, 운동은 이른바 ‘적폐청산’에서도 최대치의 성과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탄핵으로 한풀 꺾여 ‘순치’되면서 지배집단은 피해를 상당히 경감하면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3차 선전물은 그 때의 ‘상대적 성과’의 크기와 앞으로의 투쟁 방향, ‘상대적 패배’의 원인 분석 그리고 탄핵과 이후의 선거 국면에서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높은 자유주의 정당(특히 민주당)의 성격과 노동계급의 목표 등을 제시하였다.
2017년 3월 14일, 온라인으로만 발표된 4차 선전물은 우리 입장에 대한 비판에 반비판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격동이 시작된 원인, 민주주의 투쟁과 사회주의적 계급투쟁의 관계 그리고 노동계급의 원칙 등 투쟁의 전체적 성격과 목표를 다루었다. 그런 점에서 20여주에 걸친 박근혜 퇴진투쟁을 총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4차 선전물에서 언급했듯, “자본주의는 그리고 체제 모순이 곪을 대로 곪은 이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의 격동을 주기적으로 선동한다.” 주기적인 갈등의 축적과 그 폭발은 임기응변의 처방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이 말기 자본주의의 본성적 특질이다. 견딜 수 없는 사회모순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회격동을 또 낳을 것이고,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노동인민의 에너지는 다시 분출될 것이다. 분출된 사회에너지가 제 곬으로 뻗을 때에만 인민의 요구는 실현된다. 따라서 문제는 그 때 그 에너지가 어떤 정치조직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 유도될 것인가이다.
2016년~2017년 겨울을 뜨겁게 달군 한국의 격동과 그를 통해 표현된 사회동학의 분석은 그런 점에서 깊은 가치가 있다. 전쟁, 학살, 실업, 가난, 노동재해, 무한 경쟁, 탐욕과 노심초사 등 자본주의가 낳는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병증을 종식하고, 지금의 메마른 상상력으로는 다 열거할 수 없는 미래의 벅찬 일들을 꿈꾸고 그 실현을 모색하는 노동계급의 선진활동가들에게 이 소책자가 소중한 연구자료의 하나로 쓰이길 바란다.
2017년 3월 25일
아랍의 봄, 4.19와 6월 항쟁의 교훈을 되새기자!
‘사이비 민주화’에 속지 말자!
<2016년 11월 4일>
지금 전국이 허탈감과 분노로 들썩이고 있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쌓이고 쌓인 분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분출되고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 사태’는 솟구치는 분노의 출구가 되고 있다.
가난한 노동인민의 삶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지옥이다. 자살률은 OECD 1위이고 자살자 수는 전세계 전쟁 사망자보다도 많다. 출산율, 비정규직 비율, 남녀임금격차, 노인복지, 노동시간, 산업재해 등 삶의 질을 구성하는 주요 지표들에서 한국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계 최고이다. 물론 이것은 ‘흙수저’로 표현되는 노동인민들의 이야기이다. 부모의 지위는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유전’되어, 최순실의 딸을 포함한 극소수의 금수저들은, ‘흙수저’들의 희생 위에서, 사교육, 교양, 여가, 호의호식, 특권 등의 호사를 질펀하게 누린다.
이른바 ‘흙수저’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달픔과 절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나라에서 아이들은 양육비와 교육비 걱정 속에서 간신히 태어난다. 아이 돌봄은 고스란히 초과노동에 시달리는 부모의 몫이다. 비싼 값을 치러야만 아이들은 보육기관의 ‘사랑’을 받는다. 경쟁은 걷자마자 시작된다. 놀이와 친구와 행복은 한없이 유보된다. 인격은 무시되고 사람의 가치는 순위와 점수 그리고 돈으로만 평가받는다. 입시지옥을 거쳐 수천만 원을 들여 따내는 대학졸업장은 채무증서에 다름 아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실업이 이어지고 또 다시 지옥 같은 경쟁을 거쳐야만 노동력을 착취당할 기회가 허락된다. 인격과 감정을 반납하고 소진해야만 간신히 알량한 주거와 양식을 제공받는다. 속이 텅 빈 가면 같은 얼굴로 세계 최장시간 노동으로서만 직장과 상사는 그 존재를 허락한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은 사치품목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알바와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내일은 기약이 없고 매일은 노심초사로 채워진다. 창창한 나이에 퇴직이 강요되고 그것이 ‘명예’로울 것이라고 모멸된다. 긴 노년은 유복하지 않다. 초라하고 길고긴 고달픔이다. 그래서 노인자살률 또한 세계 최고수준이다.
박근혜와 최순실로 인한 각성
“그래도 무언가 희망이 있겠지. 혹시 내 탓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노동인민은 참고 또 참았다. 억울함과 분노는 안으로만 감추어졌다. 그것을 ‘박근혜와 최순실’이 터뜨렸다. 한국이 지옥 같은 세상이 된 것은 소수 지배자들의 탐욕 때문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럴 듯한 표정을 지어 ‘에헴!’ 거리던 정치인, 검찰, 경찰, 언론, 지식인이란 것들은 결국, 그 한도 끝도 없는 탐욕을 지키는 호위무사일 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인민은 지금 ‘최순실의 비리 · 전횡’과 관련된 책임자의 조사와 처벌, 박근혜의 즉각 퇴진을 외치며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 성명서, 거리 행진, 경적 울리기, 풍자 등 창조적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연일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지지층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방어벽은 녹아내리고 있다. 이제 정치 경제 언론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의 유력자들은, 치명적 오점이 되어버린 박근혜 · 최순실과의 인연을 서둘러 지워내려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결코 낙관해서는 안 되지만, 노동인민이 가세한 박근혜 퇴진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랍의 봄’과 ‘4.19와 6월 항쟁’의 교훈
2011년~12년 사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수백만 시위대는 수십 일도 넘게 저항했다. 그리하여 각각 23년 그리고 30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하던 독재자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퇴진시켰다. 인민항쟁의 실로 놀라운 승리였다. 세계는 그 사건들을 ‘아랍의 봄’이라고 부르며 환호했다. 그런데, ‘봄’은 곧 시들었다. 불과 4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젠 누구도 튀니지와 이집트의 ‘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곳에는 더 이상 ‘봄’이 없기 때문이다. 벌써 ‘아랍의 봄’은 기억 저편에서 희미하게 말라 버렸다.
자본주의 정치인, 언론, 경찰, 검찰, 군대 등을 거느린 튀니지와 이집트 지배체제는 교묘한 언론조작과 국가기구, ‘사이비 민주화’ 그리고 쿠데타 등을 활용하여 2011~12년의 거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잠시 무너져 내렸던 성벽은 보수되었고, 제국주의와 토착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독재는 다시 구축되었다. 저항을 멈추지 않고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죽거나 감옥에 갇혔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60년 4.19 항쟁으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렸다. 많은 희생이 따른 대규모 저항이었지만, 불과 1년 뒤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친일 장교 다카키 마사오(한국명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로 쓸려나갔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사태 전개도 비슷했다. 수백만의 시위로 직선제를 쟁취했다. 이는 그 자체로 소중한 투쟁 성과였지만, 그것뿐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여전했고, 노동인민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1997년 IMF체제 이후 제국주의 약탈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인민의 삶은 곤두박질쳤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횡행했다. 87년 6월 항쟁의 학생지도부였던 자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대거 자본주의 정당인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등으로 들어갔다. 추한 모습을 드러내던 독재 체제는 새 피를 충전했다. 그들은 기득권층의 시중을 들다가 이제는 자신이 기득권층이 되었다. 그 사이 ‘헬조선’의 궁극적 원인을 향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고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하던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옥에 갇혔다.
박근혜의 퇴진과 최순실의 처벌은 매우 중요하다. 박근혜는 즉각 타도되어야 하고, 관련된 죄과가 낱낱이 들추어지고 책임자들을 모두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이 ‘유사(類似)’ 지옥이 된 것은 단지 최순실의 농단 때문만이 아니고, 그 책임은 이 정권에만 있지 않다. 그것을 놓친다면 ‘아랍의 봄’과 한국의 4.19와 6월 항쟁의 쓰디 쓴 교훈은 재탕될 것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꼬리로 떼어준 이 체제는 다시 보수되고 정돈되어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을 여봐란 듯이 재가동할 것이다.
한국 ‘지옥도’의 장면들
근래에 우리 삶의 ‘지옥도’를 보여준 주요 사건들을 되새겨 보자.
4대강 노략질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부정선거, 간첩조작, 탈북자 납치, 대국민 휴대폰 감청, 국가보안법
통합진보당의 불법적 해산과 거짓으로 점철된 ‘내란음모 사건’, 소속 정치인 구속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국방비리
언제 터질지 모르는 원자력발전소
세월호로 인한 무고한 죽음들과 여전히 밝혀지지 않는 진상
야만적 시위 진압과 물대포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
공공기관들에 강행되는 성과 연봉제 그리고 뒤이어 올 철도, 기업은행, 공공병원, 인천공항, 가스공사, 지하철 등 공공자산의 사유화(민영화)
노동권을 짓밟는 ‘필수공익’이나 ‘대체인력(파업파괴자) 투입’
수백 일을 넘기며 전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필사적인 장기투쟁
오직 미국 제국주의의 이해에만 봉사하는 사드배치와 제주 해군기지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들에게 절실한 ‘무상 교육/의료/보육/노인부양’ 등이 거의 전무한 현실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노동여성과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의 불평등한 삶
박근혜와 최순실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이런 문제들은 단지 박근혜와 최순실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이전 정권부터 지금까지 이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의 체제는 누구의 손을 통해서건 이 짓들을 해 왔고, 하려 했을 것이다.
지금 여/야당의 정치인, 언론, 지식층은 모든 문제를 ‘박근혜와 최순실’에게로 몰며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원흉이거나 조력하거나 방관했던 자들은 슬그머니 빠져 나와, 자신들은 때 묻지 않은 양 책임이 없는 양 행세하고 있다. 친박/비박을 떠나 새누리당과 그 소속 정치인들은 모두 그에 책임이 있거니와, 민주당 역시도 자기 정권 때는 직접, 이후 정권 때는 방조하거나 적극 협력하였다. 야당일 때 비판하는 척하는 역할 놀음을 했을 뿐이다. 정의당 역시 통합진보당 해산과 ‘종북 몰이’를 방조·협력한 책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정치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 최소한, 이 문제들에 확답하지 않는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은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맡기고 알아서 잘 해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아랍의 봄’과 4.19 그리고 6월 항쟁이 보여준 쓰디 쓴 교훈을 다시 맛보아야 한다.
저들의 작전: ‘꼬리 자르기’ ‘야권 연대’ ‘계급 협조’
지금 시작되었고 곧 만개할 지배자들의 작전은 ‘꼬리 자르기’이다. 솟구쳐 오른 인민의 불만을, ‘실질적 문제들은 그대로 둔 채 인물만을 바꾸는’ 사이비 민주화 과정으로 이끌며 김을 뺄 것이다. 그들이 해결책으로 거론하고 있는 ‘거국’의 내각이란, 늘 저질러져왔던 각종 전횡과 부정비리, 가공할 착취와 억압을 ‘박근혜와 최순실 없이’ ‘안정적으로’ 집행해보겠다는, 또 다른 미봉책이며 눈속임일 뿐이다. 어느 정도 김을 뺀 후에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가두려할 것이다.
‘모든 문제는 계급 착취 때문’이라는 점을 감추며, ‘야권 연대’ ‘비판적 지지’ 등 계급 협조주의가 난무할 것이다. 그들은 ‘박근혜와 최순실만 없으면 된다. 우선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자.’라고 우리 귀에 속삭일 것이다. 새롭게 개편할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의 지옥으로 우리를 유인해 갈 것이다.
노동계급의 대응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노동계급의 대답은 전혀 다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 체제에 있다. 이 체제 자체는 이미 예전부터 기형적이고 괴이한 모습을 띄어왔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단지 그 가장 추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민주당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정치인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이 체제의 하수인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이지 해결사가 아니다. 오직 노동인민과 노동인민의 단결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노동자혁명정당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랍의 봄, 4.19와 6월 항쟁 이후를 재탕해서는 안 된다. 사이비 민주화에 속지 말자!’
정부의 비리와 부정과 전횡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자!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자!
민주당을 포함한 자본주의 정치가들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역할 놀음을 번갈아 하는 또 다른 책임자일 뿐이다. 자본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배격하자!
노동인민의 눈물을 씻어줄 우리의 정부를 수립하자!
노동자 혁명정당을 건설하자!
<2016년 11월 19일>
11월 12일 ‘민중총궐기’, 거대한 성과 그리고 약점
11월 12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인파가 서울에서만 100만이 넘게 모였다. 조직 노동자 집결장소인 시청광장에만 수십만이 모였다. 몇 미터의 이동이 불편할 정도로 빽빽이 들어찼다. 서대문, 대학로, 종로, 남대문 등 각 집결지에 모인 시위대가 행진을 시작하여 합세하자, 100만이 훌쩍 넘는 장엄한 대열이 되었다. 남한 시위 역사상 최대였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환멸이 얼마나 전국적이고 전인민적인 것인지를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광화문을 지나면서 어지러워졌다.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일사불란한 지휘도 지침도 없었다. 인파의 움직임에 따라 일부는 광화문에서 청와대를 향해 경복궁이나 안국역으로 향했고, 일부는 거꾸로 광화문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이 문제가 ‘박근혜와 최순실 때문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민주당의 집권만으로는 삶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위대열은 특히 방향을 잃었다. 앞으로는 경찰의 차량벽과 ‘비폭력’ 구호에 막혀 뒤돌아섰지만, 뒤에는 성에 차지 않는 ‘문화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2년 전 ‘박근혜 퇴진’ 구호를 단호히 거부했던, 그 참여연대 등이 주도하는 ‘문화제’는 시위의 ‘가두리 양식장’이었다. 시위대 의식과 행동의 발전은 급조된 문화제에 의해 포박당했다. 저항의 주체였던 시위대는 구경꾼으로 주저앉았다. 만담과 흥겨운 노랫가락에 분노와 결의는 때 이른 축제기분으로 대체되었다. 출연진 명단에 ‘민중가수’나 노동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주로 민주당 등 야3당 인사나 지지자들로 채워졌다. 발언은 ‘민주빠’를 벗어나지 않는 가장 낮은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자본주의나 ‘헬조선’에 관한 이야기,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노동현실, 박근혜/최순실 사태의 조력자이자 ‘헬조선’의 공범자인 민주당 등 야3당에 대한 비판은 결코 들을 수 없었다. 실망스럽게도, 웅장했던 민주노총 조직노동자 대오는 행진이 끝난 뒤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수십 만의 노동자 대오가 조직적 움직임을 이후에도 지속했다면 박근혜퇴진 투쟁에 노동자 주도성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었다. 이제 막 각성하여 참가한 대학생 대오들이 오히려 늦게까지 남아 조직적 활력을 보여주었다.
순하디 순한 시위대였다. 시청광장에서 최소 20만 이상이 꽉 들어차 집회를 열고 있는 서너 시간 동안, 을지로쪽 입구에는 기독교 광신도들 스무 명 남짓 모여 성소수자 억압과 시위대를 모욕하는 기도와 노래를 미친 듯이 불러대고 있었음에도 제압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도 극우들의 산발적 도발이 곳곳에 있었지만, 우리들의 ‘표현의 자유’를 거칠게 억압하던 그들의 ‘표현의 자유’는 ‘신사적’으로 존중되었다. 조금이라도 경찰과 충돌이 있을라치면 지레 겁을 먹고 비폭력을 외쳤다. 고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살해한 바로 그 경찰이고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 그 수뇌부가 지휘하는 그 경찰임을 잊은 듯했다.
친박 핵심들의 결단 배경: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굶어서 죽나 맞아서 죽나’
11월 12일 이후 오히려 박근혜 정권의 어조가 달라졌다. 청와대는 16일, ‘헌법에 위배되는 절차나 결정은 없고, 퇴진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새누리 친박 인사들의 말투도 공격적으로 변했다. 며칠 전만 해도 잠깐 말미를 달라고 조아리더니, 이제 ‘촛불은 언젠가 꺼질 것이고, 해볼 테면 해보라!’며 눈을 부릅뜨고 대든다.
사실, 검찰 국회 경찰 경제계 청와대 방송 정부기관 등에서 요직을 차지한 친박의 핵심들은 박근혜와 최순실 정권으로 각종 특혜를 누리고 권력을 휘둘렀다. 온갖 비리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박근혜가 스스로 물러나더라도 구속 수사를 피할 수 없고, 앞으로는 정치계나 관계에 그들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인민 항쟁으로 인해 거칠게 타도되어서 맞게 될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굶어서 죽나 맞아서 죽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게다가 지난 12일 집회를 보고 야3당과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이 시위대가 거칠게 밀고 들어올 생각은 없고 단지 압력만 가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대규모의 시위대가 모였지만 성과 없이 식어버리고 만 ‘2008년 촛불시위’의 경험도 이들의 무모해 보이는 도박의 배경일 것이다.
이 도박이 완전히 황당무계한 것은 아니다. 먼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쥐 신세인 친박 핵심들에게는 이렇다 할 다른 선택지가 없다. 오히려 ‘결사항전’을 선택할 때 희박하게나마 승산이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지만, 현재의 ‘가두리 지도부’와 세 자본가 정당이 이른바 ‘준법 퇴진 즉, 탄핵’을 선택하여 퇴진 시위가 장기화하면 시위대는 탈진할 것이고,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새로운 반격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곧 대선이 온다.
박근혜 정권 핵심은 결심한 듯 보인다. 그리하여 뒤돌아서서, 민주당 등 야3당과 시위지도부에 묻고 있다. ‘우리는 퇴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끌어내려면 경찰과 헌법의 바리케이드를 넘어 오라. 과연 그럴 배짱이 있는가? 광장에서 진검으로 맞설 용기가 있는가? 너희들은 과연 부정과 전횡 그리고 인민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운가?’
미일 제국주의자들의 자신감
한편 미일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할 일을 여유롭게 진행하고 있다. 불길은 높고 뜨겁지만 자신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타오른다. 그들은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들로 인해 남한 현정권이 붕괴되어 민주당 등 누가 집권해도 자신들의 이해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관철된다는 것을 안다. 이점을 11월 4일 오바마 행정부의 어니스트 대변인은 “미국과 한국 간의 동맹은 긴밀하고 강력한 동맹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강력한 동맹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 다른 인물들이 그 나라들을 이끌 때조차도 영속적”이라고 표현했다.
성주와 김천에서 사드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진행되던 지난 9월, 새누리당 정진석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민주당의 정세균과 우상호는 “사드 배치를 전제로 한미공조를 다짐”한 바 있다. 사드 배치 철회를 백악관에 읍소하는 청원에 10만 명이 넘게 참여하자, 백악관은 이미 결정된 사안을 가지고 꽤 시끄럽게 떠든다는 듯이 “미국은 한국 정부와 협력해 최대한 빨리 사드를 배치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대답(10월 10일)하며, ‘천조국’의 위엄과 기백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반(反)박근혜 시위가 최대의 절정에 올라 있는 어제도, 이 역시 최순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드배치를 국방부는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다. 사드 배치 예정지인 성주골프장에 상응하는 토지로 롯데에 보상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14일 가서명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군사정보협정 역시 심각한 사안이다. 이 협정은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야욕을 승인하는 것이다. 중국, 북한과의 적대를 빌미로 제국주의적 군사력 증대를 도모하는 일본은 꾸준히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고 한일군사정보협정은 그 큰 걸음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에 더해 일본까지 ‘공개적’으로 동북아 긴장을 고조시키며 전쟁 위기를 높일 것이고, 한반도는 또다시 일본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길’이 되게 생겼다. 미 제국주의 종속만으로도 숨이 막히던 한국은 이에 더해 일본제국주의도 ‘공개적’으로 섬기게 되었다.
이런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 움직임은 서울에서 얼마나 모여 시위를 하건 그리고 그 이후 누가 그 자리에 앉건 자신들이 구축한 기본 체제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들이야말로 남한과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최상위 포식자이고, 그것을 입증할 막강한 무력과 경험 그리고 정치경제적 인맥을 가지고 있다. 고작 박근혜나 최순실 또는 ‘재벌’만이 아니다.
이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지 못하는 자들은 노동인민의 벗이 아니다. 그 방향으로까지 뻗어가지 못하는 운동은 또 다시 노동계급을 배신하며 농락할 것이다.
이 싸움에 임하는 투쟁의 요체: 계급적 각성
백만 이상이 모인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우리가 자족하는 동안에도, 파업 중인 철도노동자들에 대한 징계절차가 착수되고 진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억압 체제는 12일의 위력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멀쩡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성과연봉제 폐지, 사유화 중단, 사드 철회,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해체, 세월호 진상규명, 핵발전소 저지 등’ 노동인민의 삶을 개선할 당면 요구들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민주당 등 야3당은 이 요구들에 대해서는 따로 셈하자며 낯빛을 바꿀 것이다. 그들은 철도 포함 공공기관 사유화의 주범들이었고, ‘필수공익 사업장 지정, 대체 인력 투입 합법화, 파업 손해배상 청구’ 등 파업권 무력화의 주역들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노동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원인 전부는 아니지만, 더욱 악화시킨 주범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농민, 영세 자영업자 등 노동인민이다. 더불어 ‘실업청년, 가난한 노인, 차별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와 노동여성, 경쟁 지옥에서 피지도 못하고 시드는 학생과 청소년 등’ 역시 이 박근혜 정권과 ‘헬조선’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은 박근혜 퇴진 투쟁에서 가장 선두에 선다. 노동계급의 이해는 ‘농민, 영세 자영업자, 실업자, 빈곤 노인, 성소수자와 여성, 학생 등’의 이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윤을 최대로 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계급은 모든 피억압인민과 더불어 투쟁한다.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는 투쟁과정에서 착취와 억압 체제 작동원리와 그 주범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미일 제국주의 영향 속에서 자본가 정당들의 집권만으로는 노동인민의 도탄에 처한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될 것이다. 우리가 지난 글 「박근혜 · 최순실 정국과 노동계급의 대응」에서 호소했듯, 이 투쟁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노동계급이 자본가 정당들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박근혜 타도와 더불어, 민주당 등 자본가 정당들이 이 ‘헬조선’의 원인이고 조력자이고 공범자라는 각성을 촉진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노동계급의 주된 임무 중 하나이다.
‘헬조선’을 탈출할 유일한 비상구: 노동자정부
남한 인민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류의 삶 역시 도탄에 빠져 있다. 세계 인류의 평온한 삶은 갈가리 찢기고 있다. 이윤이 지상과제인 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시스템은 전쟁, 학살, 부정부패, 가난, 실업, 인권유린, 핵 참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을 현실로 꺼내 놓고 있다. 이 체제에서 웃고 즐길 수 있는 자들은 제국주의 금융자본과 토착 매판자본 그에 기생하는 하수인 집단들뿐이다.
노동자는 공동체, 환경, 성평등, 인종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가장 친화적인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자 정부를 통해서만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럴 기반은 지금 당장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정치노선을 지니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적 노동자당이 우리에게 없다.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의 간절한 요구를 실현하고 도탄에 빠진 삶을 끝장 낼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에, 이 눈부신 대의에, 선진노동자와 먼저 깨달은 청년들이 적극 참여하기를 바란다.
정부의 비리와 부정과 전횡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자!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자!
민주당을 포함한 자본주의 정치가들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역할 놀음을 번갈아 하는 또 다른 책임자일 뿐이다. 자본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배격하자!
세 자본가 정당과 친자본주의 시민단체를 배제한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를 조직하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
노동자 혁명정당을 건설하자!
계급 대 계급의 정치를!
진짜배기 노동자당을 건설하자!
<2016년 12월 10일>
국회에서 18대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10월 29일부터 시작된 ‘박근혜퇴진정국’은 그 전반전을 매듭짓고 후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싸움의 추이를 되새겨 평가하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점검하자.
거대한 시위대와 풍전등화의 박근혜 정권
박근혜-최순실 추문으로 시작된 ‘박근혜퇴진 민중총궐기’는 10월 29일 시작된 이래 6주 동안 진행되었다. 시위 참가 인원은 비약적으로 상승하여 처음에는 3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11월 5일에는 20만으로 껑충 뛰었고, 12일의 3차 집회는 백만을 돌파하였다. 한국 집회 사상 서울에 가장 많이 모인 시위대였다. 4차인 19일 서울 60만 전국 95만으로 잠깐 주춤하는 듯하였지만, 5차인 26일 서울 150만 전국 190만이 되었다. 6주차였던 12월 3일에는 서울 170만 전국 230만으로 역대 최대 참가 기록을 또 다시 갱신하였다.
‘박근혜는 당장 물러나라! 국민의 명령이다!’라고 외친 서울 집회에 백만 명이 참가한 11월 12일은 사태의 변곡점이었다. 서울의 광장과 거리에 백만이 나서고, 전국적으로 박근혜정권 지지도가 5%를 밑도는 상황에 이르자, 이제 박근혜퇴진정국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국적 불만과 시위는 무시하거나 진압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 버렸다. 민심은 천심이 되었다. 광장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어떻게든 수용하여 끓어오른 전국적 분노를 비껴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양보하고 어떤 방식으로 정국을 연착륙시키느냐였다.
지배엘리트의 지침: ‘탄핵으로 대중적 분노를 천천히 흡수하여 식힌다.’
만약 시위대의 압력에 밀려 박근혜가 자진사퇴하거나 또는 폭력적으로 타도되는 것은 지배엘리트로서는 단연코 피해야 할 경우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치 갑자기 불어난 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무너진 댐처럼, 인민의 불만은 박근혜 · 최순실만이 아니라, 지금 정권으로 권력과 이득을 독점하던 세력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고, 나아가 체제 자체의 위기로 비화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수문을 열되 적절하게 조절되어야 하고, 방류된 물은 하천의 둑을 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어야 했다.
12일 이후, 썩어빠진 청와대와 친박들은 예상을 넘어 격앙된 정국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었다. 하지만 지배대오는 며칠 사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지배엘리트는 후퇴를 결정했고 재집결지와 새로운 방어선을 하달했다. ‘시위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타도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진 사퇴까지 포함하여, 시위대에 의해 끌려내려 가서는 안 된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이 주도하는 시위지도부는 ‘스스로’ 물러나라고 압력을 넣을 뿐 담을 넘을 생각과 배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가능하면 긴 시간 동안 조금씩 분출하여 시위대의 압력을 낮추고 식힌다. 표적이 된 박근혜와 최순실 등은 양보하되, ‘법적 절차를 준수’하도록 유도한다. 탄핵으로 대중적 분노를 흡수한다.’
한국의 군사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고, 한국경제의 대주주인 미국 금융자본은 한국 정세를 결정하고 작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는 지휘부의 주요 참여자이다. 위의 지침은 당연히 미대사관이나 미CIA 등의 지침이기도 할 것이며, 이러한 지침은 곧 정국에 영향을 주는 주요 정치인사들에게도 전달되고 설득되었을 것이다.
지배엘리트의 이러한 입장이 처음 공개된 것은 조선일보 전 주필 조갑제의 14일 논평이다. 그 논평에서 조갑제는 이렇게 주문한다.
“이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마지막 임무는 헌정(憲政)질서 수호를 위한 정치적 순직(殉職)이다. 절대로 시위에 굴복, 하야해선 안 된다. 이는 민중혁명의 공범(共犯)이 되는 것을 뜻한다. 탄핵을 받아 물러나는 것은 민주적 절차를 따르는 일이므로 혁명과는 관계없다. 앞으로 대통령은 온갖 수모를 받겠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를 56년 전으로 돌려선 안 된다.…버티는 것이 속죄의 길이다.”
청와대와 친박은 “정치적 순직(殉職)”을 결심했다. 16일, 수습할 말미를 달라고 조아리던 청와대와 친박은, ‘헌법에 위배되는 절차나 결정은 없고, 퇴진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눈을 부릅뜨며 밝혔다.
야3당의 탄핵 수용
아래에서 위로 향하던 압력은 이제 지배층의 결단으로 되튕겨졌다. 이제 압력은 위에서 아래로 거꾸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탄핵을 받을 거냐 아니면 거친 싸움을 해볼 텐가?’
야3당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도 헬조선의 공범자였다. 박근혜 정권이 집행한 반인민적 정책을 조력했고, 구성인자와 정책이 새누리당과 상당히 겹치며, 노동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박근혜 정책 대부분은 그들이 집권하던 시기부터 구상되거나 집행했던 것들이다. 그들 역시도 솟구친 물의 압력이 댐을 무너뜨리거나 둑을 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노여움으로 솟구친 물결은 자칫 자신들도 삼킬 우려가 있는 터였다. ‘정권교체’ 즉,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실권과 자신들의 집권은 꿈에도 바라는 바이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예측불가능하게 정국이 흘러가는 것은 그들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 당은 광장 안 나가…제도권에서 싸울 것”이라는 우상호의 말이나 “명예퇴진에 협력하겠다.”라는 문재인의 제멋대로 약속은 바로 그러한 태도의 표현이었다. 자칫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질 것을 저어하는 것이었다.
연일 센 발언을 내놓으며 지지율이 솟구치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은 “탄핵이 압도적인 국민의 뜻이고 순풍이다. 퇴진 촉구와 탄핵을 병행 추진해야 한다(17일 김현정 뉴스쇼).”라며 공식적으로는 제일 먼저 ‘탄핵 수용’을 밝혔다.
‘당장 물러나라’는 대규모 시위가 19일 4차에 이어졌음에도, 20일 모인 6명의 이른바 ‘야당 잠룡’은 “국민적 퇴진운동과 병행해 탄핵 추진을 논의해줄 것을 야3당과 국회에 요청한다.”라며 ‘야3당의 탄핵 수용’을 기정사실화했다.
<퇴진행동>이 탄핵을 수용하는 방식
‘박근혜는 지금 당장 내려와라!’는 명령을, 새누리당의 협력을 받아야만 발의가 가능하고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6개월이 걸린다는 ‘탄핵’으로 야3당이 바꿔치기한 이후, 정국은 이제 또 다른 변곡점을 맞았다. 이제 ‘탄핵’이라는 위로부터의 압력은 야3당을 통해 거리로 전달되었다.
무정형에 가까운 시위군중의 암묵적 지도부가 되어 온 <박근혜퇴진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은 야당에 의해 전달된 물음에 분명히 답할 의무가 있었다. <퇴진행동>은 시위대의 압력이 굴절되어, 이제 위로부터 내려온 그 압력을 다시 쳐올리거나 아니면 그 압력을 수용해야 했다.
‘탄핵’이냐, ‘당장 물러나기’냐? 이 둘은 전혀 다르다. 방식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물론 ‘탄핵’을 통한 박근혜 정권의 종식 역시 인민의 요구가 일정하게 관철된 결과이지만, 결집된 에너지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결과이고, 간절한 바람인 헬조선의 종식에는 거의 미치지 못할 것이며, 길고 교묘한 과정을 통해 ‘민의’는 왜곡되고 날치기 당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탄핵’은 거리에서 국회로 정국의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지금 보는 것처럼, 야3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탄핵 의결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친박 골수를 제외한 ‘비박’들에마저도 면죄부를 준다. 정진석이나 김무성 같은 자들마저 마치 민주주의 편에 선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퇴진행동>은 얼버무렸다. 11월 26과 12월 3일 두 번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지만,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입장 발표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퇴진행동>은 탄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런 방식으로 시위대에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했다. <퇴진행동> 안에는 ‘혁명, 변혁, 노동자’ 등을 내세우는 단체들도 있지만, 그 단체들 역시 그 문제를 <퇴진행동> 내에서 따지고 ‘국민의 명령’을 사수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탄핵을 퇴진의 방법으로 채택한 순간 이제 거리 시위는 이른바 ‘법 절차’와 국회의 들러리가 된다. 탄핵의결 국면에서는 새누리당을 압박하는 용도로, 그 이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헌법재판소 9명의 도적을 압박하는 용도로 제한적으로만 쓰일 것이다.
노예의 사슬
‘개돼지’로 길들이는 노예의 사슬은 이렇듯 고리 몇 개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지금 그 노예의 사슬은 민주당―정의당―<퇴진행동>―‘<퇴진행동> 내 노동자 대변인’이라는 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고리들은 자기 오른쪽 핑계를 대며 자기의 왼편을 끌어붙이는 방식으로 인민을 체제의 노예로 차근차근 편입한다. 즉, 민주당은 새누리당을 핑계 댄다. 정의당은 야3당의 공동보조를 주장한다. <퇴진행동>은 야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퇴진행동> 내 소위 ‘좌파’는 거친 발언이 자칫 <퇴진행동>에 참여한 ‘우파’의 동요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누군가는, 어느 단계에서건’ 그 사슬을 끊어내어야 하지만, 노예의 사슬은 그런 방식으로 유지된다. 일상 속에서 파편화된 인민은 오직 현존하는 정치조직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치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온전히 대변하는 조직이 없을 경우 그런 방식으로 인민은 체제의 노예로 포섭되는 것이다.
‘탄핵’과 헌법재판소
탄핵이 의결된 지금 칼자루는 헌법재판소가 쥐게 되었다. 6주 동안 연인원 수백만이 모여 광장과 거리에서 ‘박근혜의 퇴진과 처벌’을 의결했지만, 그 의결의 유효성은 이제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9명의 헌법재판소 판사들에게 확인받게 되었다. 헌법재판소 9명의 구성은 이렇다. 대통령 임명 3인, 국회 추천 3인, 대법원장 지명 3인. 이들 9명은 2014년에, 최순실-김기춘의 명을 받아 2012년 총선에서 200만표를 얻은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고, 2015년에는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판결하였다. 이 역시 김기춘의 지령이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수백만이 6주 동안 서울과 전국에 모여 거듭 확인한 ‘박근혜 퇴진’은, 9명의 법복 입은 도적들 앞에 조신하게 고개 숙이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 ‘그것이 과연 헌법에 합당한 의결이었는지’를 심사받아야 한다.
그 자들이 잘했던 것이라곤 백성의 삶과 동떨어져 ‘잘’ 살았던 것밖엔 없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두꺼운 육법전서를 졸졸좔좔 외웠던 것뿐, 청춘의 한때 엄중한 역사의 때 남들 다 거리에 나설 때 어둔 구석 골방에서 꾹 참아 외면해 내었던 것뿐. 혹시나 출세에 지장 있을세라 노심초사 윗사람 눈치를 잘 보았던 것뿐. 역대 반인민 정권들을 거치면서 모난 돌이 되지 않아 정을 한 번도 맞지 않았던 것뿐. 그리하여 전두환이든 노태우든 김영삼이든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박근혜 등의 무난한 총애를 얻었던 것뿐. 특히 마지막 순간에 최순실의 눈에 꽉 들어찼던 것일 뿐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그럴듯한 문구와 그 믿음은 이렇게 농락당하고 있다. 실제 현실 속에서 제 모습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헬조선’은 달라지고 있는가?
광장을 채우고 거리를 넘실거리는 지금의 분노는 단지 ‘박근혜와 최순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힘겨운 삶을 살아내던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청년실업자, 입시지옥의 중고생, 빈곤 노인 등은 그 삶의 원인 한 자락을 이번 사태로 보았다. 뭔가 이루어질 듯한 희망을 보았고 그 통쾌한 출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박근혜가 퇴진하고 최순실 등 몇몇 핵심인사의 법적 처벌은 이루어지겠지만, 각자의 구체적 삶의 개선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다음은 박근혜퇴진 시위가 타올랐던 10월부터 지금까지의 사실들을 살펴본 것이다.
-지난 여름 경북 성주와 김천은 사드 배치 반대로 연일 뜨거웠다. 10만 명이 사드배치 철회를 백악관에 청원했다. 그러자 지난 10월 10일 백악관은 “미국은 한국 정부와 협력해 최대한 빨리 사드를 배치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국방부는 11월 11일 롯데와 사드부지협상 타결했다고 발표했다.
-11월 14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군사정보협정이 가서명되었다. 1년 전 한일위안부합의에 이은 것이다.
-작년 11월 14일에도 ‘민중총궐기’가 있었고, 평생을 민주화/농민운동에 헌신한 ‘고 백남기 농민’은 그 날 물대포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그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민주노총위원장 한상균은 체포되었고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심에 불복한 항소심이 지난 11월 21일에 있었는데 그 항소심에서 검사는 1심 선고보다 3년이 많은 8년을 구형했다. 우병우를 극진히 대접하던 검찰이었으나, 민심이 하늘을 찌르는 와중에도 이 정권의 검찰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음을 그 구형으로 보여준 것이다.
-11월 22일, 이재용의 불법적 삼성합병을 돕기 위해 국민연금이 3,0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보도되었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수사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11월 24일, 서대문경찰서는 ‘정유라 특혜’의 온상인 이화여대에서 ‘미래라이프대’ 설립 반대 농성을 벌였던 이대 총학생회장을 형사입건하여 검찰에 송치했다.
-11월 26일, 민중총궐기 합류를 위해 트랙터를 타고 상경하던 농민 시위대가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저지되었다.
-11월 28일, 박정희를 미화하는 국정교과서 검토본이 ‘올바른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같은 28일, 국세청은 ‘국세청―최순실 연루설’ 제보자에게 2000여만 원의 세금부과로 보복했다.
-12월 8일 철도노조 김영훈 지도부는 ‘성과연봉제 철회, 철도 등 공공기관 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70여일을 이어가던 파업을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핵심 요구인 ‘성과연봉제 철회’에 대한 어떤 약속도 없었거니와 아무런 투쟁성과도 얻지 못한 채로였다. 그 사이 251명이 징계 대상이 되었고 파업참가자들에겐 평균 1천 174만원의 임금손실이 있다고 한다.
-12월 8일 서울 남산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일왕 아키히토의 생일파티가 열렸다.
야3당은 ‘헬조선’의 원인이지 해결자가 아니다
박근혜퇴진시위가 거세지자, 민주당 등 야3당은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투사인 양, 자신들은 그동안 전혀 몰랐다가 지금에야 깨달은 양, ‘헬조선’과 그간의 실정에 책임이 없는 양, 의기양양하게 행동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2014년 침몰한 세월호 진상규명에 여당 핑계를 대던 민주당 등은, 2016년 4월 총선에서 여당보다 많은 의석을 얻은 그 이후에도 여당 핑계를 대며 진상규명을 외면했다.
-철도노조는 72일이라는 장기파업을 이어갔지만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된 주된 원인은 파업권을 무력화한 ‘필수공익사업장’과 ‘대체인력’ 투입이라는 초헌법적 노동악법 때문이었다. 전자로 약 60% 가량의 인력은 파업에 참여할 수 없으며, 나머지 공백의 상당부분은 ‘대체인력’으로 메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둘 모두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6년 입법된 것들이다.
-‘성과연봉제’의 무리한 강행은 철도 수도 병원 가스 인천공항 등 공공기관 민영화의 장애물인 노동조합의 기를 한풀 꺾자는 수작이다. 이는 과거 민주당 집권 때부터 입안되고 추진되던 정책이다.
-조작된 ‘내란음모사건’으로 2013년 이석기 의원 체포,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등이 최순실-김기춘의 모의로 인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지금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과 정의당 등은 그 당시 적극 협조한 바 있고, 지금까지 아무런 사죄표명을 않고 있다.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는 농민의 고통은 노무현 정권이 추진한 한미FTA로 더 심화된 것이었다. 2005년 11월 농민 두 명이 시위 도중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과했지만 농민의 폭력시위를 탓했고, 경찰청장을 경질하지 않았다.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최고이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다. IMF, 구조조정, 노동유연화, 쉬운 해고, 명퇴, 비정규직 확대 등과 함께 그 수치들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그 조치들은 민주당 집권 시기부터이다.
이번 사태로 민주당 포함 야3당은 다음 대선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쥐고 각종 이권을 주무르는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하지만 도탄에 빠진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실업 청년 등의 삶은 민주당의 집권으로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민주당 등 야3당은 헬조선의 원인이지 해결자가 아니다.
야3당을 경계하자 그들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말자
우리는 지난 11월 5일에 발표한 박근혜 퇴진 1차 선전물 「박근혜 · 최순실 정국과 노동계급의 대응」에서 “아랍의 봄, 4.19와 6월 항쟁의 교훈을 되새기자!”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정치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 최소한, 이 문제들에 확답하지 않는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은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맡기고 알아서 잘 해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아랍의 봄’과 4.19 그리고 6월 항쟁이 보여준 쓰디 쓴 교훈을 다시 맛보아야 한다.…지금 시작되었고 곧 만개할 지배자들의 작전은 ‘꼬리 자르기’이다. 솟구쳐 오른 인민의 불만을, ‘실질적 문제들은 그대로 둔 채 인물만을 바꾸는’ 사이비 민주화 과정으로 이끌며 김을 뺄 것이다.…‘모든 문제는 계급 착취 때문’이라는 점을 감추며, ‘야권 연대’ ‘비판적 지지’ 등 계급 협조주의가 난무할 것이다. 그들은 ‘박근혜와 최순실만 없으면 된다. 우선 새누리당의 집권을 막자.’라고 우리 귀에 속삭일 것이다. 새롭게 개편할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의 지옥으로 우리를 유인해 갈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실패에 대한 오충일 목사의 다음 회고도 같은 맥락이다.
“6월 항쟁이 일단 승리하자,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나니까, 나를 포함해 6월 항쟁 지도부에 있던 이들이 주도권을 정치권에 넘겨버렸습니다. 야권의 두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 김대중씨를 너무 믿어버렸습니다.…절대로 이 정국의 주도권을 정치권에 넘기면 안 됩니다. 몇몇 대선 후보나, 정당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오마이뉴스>, 12월 5일
<퇴진행동>과 그 내부 ‘노동자대변인’들이 탄핵을 순순히 수용하면서 이제 정국은 탄핵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우리의 우려는 상당히 현실화되었다. 같이 탄핵되어야 할 새누리당 비박과 야3당은 ‘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시위대는 광장에서 물러나 앞으로 더욱 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격려하거나, 실망하고 한편 다시 기대하는 ‘구경꾼’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철도노조의 ‘백지타결’과 <퇴진행동>의 탄핵수용의 정치적 뿌리
12월 8일 김영훈 철도노조 집행부가 국회에 백지 위임하며 파업을 종결한 것과 11월 중순 이후 <퇴진행동>이 야3당의 ‘탄핵을 통한 퇴진’을 저항 없이 수용한 것은 동일한 정치적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자본가 정치집단에게 노동인민의 이해를 실현해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 사회는 계급적대를 중심 갈등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노동인민의 일터에서 나타나는 생존권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투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인민이 주도권을 놓지 않을 때라야만 자본가 정치인 일부가 따라오려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다. 거듭되는 패배는 거의 대부분 바로 이점 때문이었다. 노동인민이 계급적으로 각성하지 않는 것, 그리고 ‘노동, 혁명, 변혁’ 등을 주장하는 정치조직들마저 그 각성을 흐리고 계급협조에 참여하거나 방조하는 것이다.
굳이 가정한다면, 만약 철도노조 지도부가 ‘필수공익사업장’이니 ‘대체인력’이니 하는 자본가 법 정신마저도 훼손하는 악법들을 무시하며 전면파업에 돌입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광장의 엄호를 받으면서 단기간에 승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징계나 손해배상 등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퇴진행동>이 11월 12일 이후 ‘당장 끌어내리자!’를 퇴진의 유일한 진로로 분명히 했다면, 야3당이 함부로 그 뜻에 거스르려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야3당이 어물쩡거렸다 하더라도, 백만 시위대를 믿고 청와대를 더욱 공세적으로 압박했다면 최소한 자진사퇴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세는 ‘사드, 성과연봉제, 공공기관 민영화, 세월호 진상규명, 원자력발전소, 재벌 비리 등에서’ 지금보다 최소 열 배는 유리한 역관계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지적하였지만, 한계가 많은 ‘탄핵’ 역시 거리로 나선 노동인민의 항쟁으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투여된 에너지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결과를 낳았고 되돌려질 가능성이 높지만, 그 이전보다는 나은 정세가 조성된 것이 사실이다. 넓어진 정치적 공간을 통해 노동인민의 요구들이 더 적극적으로 분출될 것이고 그래야 한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저지른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통합진보당 해산, 세월호 진상은폐, 전교조 법외노조화, 국정교과서,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공공기관 민영화 등’ 그들이 행한 실정을 캐고 바로잡는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 작업에서 핵심은 결국 지도력이다. 지난 6주간 경험했던 것처럼, 노동인민의 정치에너지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폭발하여 차고 넘친다. 문제는 그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제 순간에 포착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지도력이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모든 악은 생산수단 사적소유와 이윤추구 최대화 때문에 비롯된다.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를 통해서만 인민의 평화롭고 유복한 삶이 보장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급적 이해에 온전히 복무하는, 노동계급과 인류의 역사적 실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계승한 노동자정당이 필요하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며 멀고 험난하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이 작업에 끈기 있게 임하고 있다. 2016년 박근혜 퇴진투쟁을 통해 영감을 얻은, 호연지기의 투사들이 이 벅찬 역사적 기획에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박근혜 정부의 비리와 부정과 전횡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자!
‘통합진보당 해산, 세월호 진상은폐, 전교조 법외노조화, 국정교과서,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배치, 공공기관 민영화 등’ 박근혜-최순실 정권의 실정을 캐고 바로잡자!
이석기와 한상균을 석방하라!
민주당을 포함한 자본주의 정치가들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역할 놀음을 번갈아 하는 또 다른 책임자일 뿐이다. 자본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배격하자!
세 자본가 정당과 친자본주의 시민단체를 배제한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를 조직하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
진짜배기 노동자당을 건설하자!
Ⅳ. 박근혜 퇴진투쟁에 담긴 사회동학과 노동계급의 원칙
채만수의 굴종적이고 해로운 정세 인식 비판
<2017년 3월 14일>
[괄호]와 밑줄 등의 강조는 모두 작성자의 것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이하 노사과연)의 채만수 선생의 글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재벌, 노동자계급」이 <정세와 노동> 2017년 2월 호에 실려 발표되었다.
몇 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는 박근혜 퇴진 국면 이후 쏟아지듯 발표된 많은 글들 중에서 이 글이 특히 우리 눈에 띄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박근혜 퇴진! 노동자 정부!(2016년 11월 19일)」를 비판하며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위원이라는 소박한 직함으로 발표되었지만, 채만수 선생(이하 ‘선생’)은 노사과연의 창립자이며 오랜 기간 소장 역할을 해 온 분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스탈린주의 신봉자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이른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조류’ 내에서 일정한 지지자층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대단히 흥미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인가?
둘째,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건설’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 등은 “사물 자체, 정세 자체, 역사 자체의 운동・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도 능력도 없는” “현실과 상관없이 급진적・‘혁명적’으로 사고하는 자”의 망상일 뿐인가?
셋째, 그러므로 “현재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조직적 역량으로는 분명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목표들”인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등은 결코 제기해서는 안 되고, “당면의 과제・요구”는 오직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을 폐지・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 즉, 요약하여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넷째,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엥겔스, 1865).”의 인용은 적절한가? 1865년 엥겔스의 정신과 2017년 선생의 정신은 같은 것인가?
지금까지의 박근혜 퇴진 정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탄핵이 인용된 지금, 앞으로의 정세를 헤쳐 나갈 원칙 확인을 위해, 이 문제들을 따져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 * * * *
첫째,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인가?
‘지배집단의 기획과 연출’이라고 결론짓는 선생의 생각을 요약해서 따라가 보자. 그는 ‘박근혜 정권 몰락의 기획・연출자 재벌’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번의 ‘촛불혁명’, ‘시민혁명’에서는 저들[재벌・족벌 언론과 공영방송들]의 행동거지, 저들의 대응이 평소의 그것들과는 확연히, 정말 판이하게 다르다! ① 우선,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공(功)이 극히 놀랍게도 분명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와 그 계열사인 ‘종편’ ≪TV조선≫에게 있다.…이 상황을 사실상 격발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 경찰, 검찰, 법원. 저들이 누구인가?…그러한 저들이 갑자기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문제 삼으며 시민들의 시위를 선동하고 보호・보장하고 있는 것이다.…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평소와는 판이하게 움직이고 있고, 그 배후는 누구일까? 저들이 노리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시민혁명’을 기획하고 연출한 것은 결국 재벌이며, ‘촛불혁명’・‘시민혁명’은 동시에 ‘재벌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과도한 추론일까?”
하루 최대 2백만에 이르고 연인원 천만을 넘었던 인민의 격동이 “결국 재벌의 기획과 연출에 의한 것”이라고 선생은 결론짓는다. 자신의 생각이 ‘박근혜 퇴진’과 더불어 ‘재벌 응징’을 외쳤던 시위참여자들과 크게 달라 놀라울 테지만, 치밀한 사고의 결과라는 듯이 묻는다. “과도한 추론일까?”
선생으로서는 이 일련의 정치사태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극우언론 중의 극우언론 조선일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지배계급 일부일 뿐 아니라, 중요 기둥 중 하나인 조선일보가, 이른바 ‘촛불혁명’이라는 인민의 격동을 불러오고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스스로도 ‘놀라운’ 결론에 이른다: ‘이 촛불혁명은 지배계급이 기획하고 연출한 것이다!’
조선일보 등의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가 이 정치사태를 ‘격발’했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일상적 시기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20주에 이르는 인민의 격동과 박근혜 탄핵, 조윤선, 김기춘, 이재용 등의 구속, 노동계급을 포함한 이른바 ‘국민’의 상당한 정치의식의 성장과 조직화 등을, 재벌이 의도하여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것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사고이다.
단지 지배계급은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사고로 선생은 이 사회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지배계급 일부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자, ‘애초에 모든 것이 지배계급 기획과 연출’이라는 음모론적이고 피해망상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 모순이 가장 근본적이지만, 그 외에도 다층적이고 다각적으로 수십 갈래의 모순이 중첩되어 얽히고설킨 고도의 복잡계이다.
그리하여 사회구성원들은 자기정체성을 항상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에서 찾지는 않는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관되게 계급적으로 각성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계급 갈등은 일찌감치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노동계급에 속했다 하더라도 일상적 개인 대부분은 몰계급적이거나 계급 배신적인 의식 속에 살아간다. 심지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마저도 계급의 역사적 대의를 거스르는 행위를 종종 한다. 이런 일들은 계급적 각성 정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지배계급 내에서도 일어난다. 피지배계급의 도전 앞에서는 단일한 이해를 갖지만, 그들 내부는 다층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갈라져 있고, 그들 나름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툰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은 여러 파당으로 갈라져서 자기 목숨만이 아니라 삼족의 명운을 걸고 싸웠다. 여당 국회의원도 지내고 수 십 억을 뇌물로 쓸 정도로 재력가였던 성완종은 지배계급 내 이전투구에서 패배하자, 지배집단의 비밀을 폭로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본인은 자살했다. 트럼프의 당선 전후 미국 지배계급이 분열하고 서로 시끌벅적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뉴스에 오르고 있다. 이런 일들은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자기모순과 그로 인한 체제 불안이 일상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사례가 있었고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다.
2월 혁명 직전, 지배계급 일파에 살해된 숨은 권력자 라스푸틴 이야기는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암시를 준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에서 묘사하는 다음 이야기에서, 라스푸틴을 최순실이나 우병우로, 짜르는 청와대로, 지배계급은 조선일보로 바꿔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산 지배계급은 이해관계, 관습, 비겁함의 측면에서 짜르 체제를 완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라스푸틴이 없는 짜르를 원했다. 그러자 짜르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인정할지어다.’라고 이들에게 응답했다.…시베리아의 예수 라스푸틴 때문에 이 모든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이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든 불길한 징조들이 파도처럼 지배계급을 덮쳤다.…혁명 전에는 최상층 계급들조차 야당이 되었다. 호화 살롱과 클럽에서 정부의 정책은 가혹하고 적대적으로 비판되었다.…그리고 이들의 지위 때문에 우스개 이야기들과 악의에 찬 과장된 이야기들을 일반인들은 대단히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성 행위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최상층 부위의 뇌리에 떠올랐다.”―상권, 5장 무혈쿠데타에 대한 논의
자본주의는 그리고 체제 모순이 곪을 대로 곪은 이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의 격동을 주기적으로 선동한다. 모순으로 인한 갈등의 축적과 그 폭발은 의도적 기획의 산물이 아니다. 지배계급의 의식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사회 현상이다. 이렇게 위기에 처하면 그 사회 지배집단 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분열이 노골화된다. 극심해진 압력에 못 견딘 지배 집단 일부는 (결과적으로) 자기 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돌출적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 큰 상처를 입히며 심지어 혁명이라는 역사의 전진에 ‘기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점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베스삐에르는 입법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반대는 왕정을 약화시키면서 부르주아 계급을 분기시키고 이후 인민대중을 분기시켰다.…귀족계급에 저항하는 혁명은 첫 단계에서 비록 일관되지는 못하나마 귀족, 왕족 등 특권 최상층의 진정한 협력을 얻는다. 이 놀라운 역사 현상은 사회계급 이론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이론의 조잡한 해석[채선생의 것과 같은]에 모순을 일으킬 뿐이다.…사회의 모든 적대관계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혁명은 터진다. 그러나 이 상황은 구체제의 계급들 즉 해체될 수밖에 없는 계급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귀족계급은 자신이 모든 적대감의 초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료집단을 비난한다. 그러면 관료집단은 귀족계급을 비난하고 이 양자가 함께 또는 따로 자신들의 불만을 자기 권력의 원천인 왕정의 정점에 퍼붓는다.…자신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이유는 왕정의 맹목이나 이성 상실에 있다고 귀족계급은 생각한다. 구 사회를 새로운 사회와 화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특권층은 믿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귀족계급은 자신의 종말을 인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을 구체제의 가장 성스러운 권력인 왕정에 대한 반대로 전환시킨다.…귀족도 이런 식으로 체제 저항의 빛을 내고 사라진다. 이로써 이들은 자신의 철천지원수인 인민에게 커다란 봉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구체제 붕괴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은 사회계급 이론과 일치한다.”―같은 책, 같은 장
이렇듯 지배계급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계급 이반행위는 사회동학의 중요한 일부이고 게다가 혁명기의 중요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것을 첫 번째 조건으로 언급한다.
레닌,
“결전이 무르익었다는 것은 첫째, 우리에게 적대적인 계급의 모든 세력이 충분히 혼란에 빠지고, 충분히 서로 치고 받고 있으며, 자신들의 힘에 부치는 투쟁으로 스스로 충분히 약해졌을 때, 둘째, 동요하고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어중간한 모든 분자들, 곧 부르주아지와는 다른 쁘띠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민주주의가 인민 앞에서 충분히 폭로되고, 자신들의 실질적 파탄으로 충분히 창피를 당했을 때, 셋째, 부르주아지에 맞서 아주 단호하며 헌신적으로 대담한 혁명적 행동을 지지하는 대중적 분위기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나타나 강력해지기 시작했을 때를 말한다. 바로 그때 혁명은 무르익은 것이며, 바로 그때 우리의 승리는, 만일 우리가 위에서 언급하고 위에서 간략하게 기술한 모든 조건을 올바로 고려하고 올바로 시기를 선택한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보된 것이다.”―레닌과 『좌익 공산주의 소아병』 10장 ‘몇 가지 결론’, 1920년
트로츠키,
“노동자 혁명 승리의 기본 조건들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확립되었고 이론적으로 해명되었다: (1) 부르주아 체제의 위기와 지배계급의 혼란 (2) 금융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위해서 그 지지가 필수적인 소자본가 계급의 격심한 불만과 사회변화에 대한 갈망 (3) 체제에 대한 인내력을 상실한 노동계급의 반체제 인식과 혁명적 행동에 대한 욕구 (4) 노동계급 전위당의 명확한 강령과 확고한 지도력. 이것들이 노동자혁명 승리의 4가지 조건이다.”―「전쟁과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에 대한 제4인터내셔널 선언」, 1940년
‘박근혜 정권 몰락의 기획・연출자 재벌’이라는 ‘무고(誣告)’를 받고 있지만, 재벌 역시 이번 격동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고 위기에 처했다. 지켜보는 눈들을 따돌리고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할 상속 문제가 세상에 까발려지고, 지금까지 한 번도 구속된 적이 없는 삼성의 총수가 구속 수감되었다.
자신의 피해 망상적이고 수동적인 세계 인식에 도전하는 이런 사실에 대해, 그는 “기업가 정신”에 입각한 “혁신과 모험”일 뿐이라고, ‘아둔한’ 독자들을 야단친다.
“재벌 총수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지 않느냐고? ― 그럼, 아무려면 설마, 생채기도 안 나고 대사를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재벌 총수들이 아무런 곤혹도 치르는 일 없이 마냥 꽃방석에만 앉아 있던가? 혁신과 모험이야말로 기업가 정신의 요체라 하지 않는가?”
재벌이 ‘박근혜-최순실 체제의 피해자’인 양 묘사하는 선생의 인식은 헌법재판소나 문재인 같은 체제 하수인들의 인식과 닮았다. “[최순실 비선실세에 의해] 이익이 농단(채만수)” 당한 재벌들이 조선일보 등을 앞세워 이번 거사에 나섰다고 선생은 설명한다. 하지만 특검에 따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이재용 등은 최소 1천 388억 원의 국민연금 손실을 포함하여 최소 8천 549억 원의 이득을 얻었다(TV조선, 2017.03.01.). 그런데 지금 그 일들이 다 들통 나서 그 이득들을 토해내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자신은 감옥에 갇혔다.
그것마저 “혁신과 모험”이라는 “기업가 정신”의 발로라고 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 * *
‘박근혜 퇴진 정국’의 원인, 과정, 결과에 대한 미시(微視) 연구는 흥미로울 것이고 앞으로 누군가 해낼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여기서 다룰 본론은 아니다. 다만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강력한 지진은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 발산하며 지상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 지속 시간은 불과 30초미만이다. 순식간이긴 하지만 그 지진이 일어나는 수십 초는 수 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지하에 축적되어 온 모순과 에너지의 표현이다. 이번 박근혜 탄핵 정국도, 표면에 드러난 조선일보 보도가 그 첫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현상적이다.
‘박근혜 퇴진정국’으로 폭발하기까지 그 저변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 갈등이 꾸준히 축적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만 열거해 보아도, 부정 대선, 세월호 학살, 국정원 감청, 사드 배치, 통합진보당 해산, 국정교과서 채택, 삼성반도체 희생자, 한일 위안부 합의, 국영기관 민영화, 성과연봉제, 백남기 농민 살해 등등. 이렇게나 많다. 사실 그 중 하나만으로도 정권타도의 방향으로 나아갈 만한 것들이었다. 다만 고도의 억압 체제 속에서 안으로 안으로만 사회 불만은 응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사회는 폭발성 높은 인화물질이 차곡차곡 쌓였고 발화점 낮은 유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밥그릇 싸움에 소외된 조선일보 등이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불똥을 튀겼다. 지배집단 내에서만 내밀하게 전해지던 박근혜-최순실의 추문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삶의 여유가 조금 더 있는 중산층은 이 사회를 비교적 잘 인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추문은 그들의 인내의 둑마저도 터뜨렸다. 행동에 나서자, 반박근혜 정서는 압도적 다수가 되었고, 사회는 폭발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미래의 지배계급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혁명정당이 없었다. 박근혜는 끌어내려졌지만, 체제는 찰과상 정도만 입고 꿋꿋이 살아남았다.
* * * * *
둘째,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건설’ ‘노동인민 시국대책회의’ 등은 “사물 자체, 정세 자체, 역사 자체의 운동・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도 능력도 없는” “현실과 상관없이 급진적・‘혁명적’으로 사고하는 자”의 망상일 뿐인가?
선생은 자신의 신조 스탈린주의를 완강히 비판해 온 볼셰비키그룹을 이번 기회에 ‘현실 감각이 없는 좌익적 몽상가집단’으로 낙인찍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노선을 가진, “인류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전위 볼셰비키”를 자처하는 한 뜨로츠끼주의 ‘혁명가단체’ “볼셰비키그룹”이 11월 19일에 배포한 전단(傳單)을 한번 들여다보자.…아무튼 그렇게 시위를 “야3당과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있다고 명언(明言)하면서도, 이 시점에서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노동자계급의 전위 볼셰비키’답다!…사물 자체, 정세 자체, 역사 자체의 운동・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도 능력도 없으면서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여 떠들어대는 데에는 유달리 유능한 ‘혁명가들’은 이러한 논의를 ‘쓰딸린주의적 2단계 혁명론’이라며 비난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계급적 각성 즉, ‘이윤을 최대로 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고, 노동자정부를 통해서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혁명 과정이고 그것이 우리 사업의 요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11월 5일, 11월 19일, 12월 10일 등 세 차례에 걸쳐 박근혜 퇴진투쟁 선전물을 작성 배포하면서 그 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 초과 착취와 초과 억압 체제에 있다. 이 체제 자체는 이미 예전부터 기형적이고 괴이한 모습을 띄어왔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단지 그 가장 추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민주당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정치인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이 체제의 하수인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이지 해결사가 아니다. 오직 노동인민과 노동인민의 단결 그리고 가장 선두에 선 노동자혁명정당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랍의 봄, 4.19와 6월 항쟁 이후를 재탕해서는 안 된다. 사이비 민주화에 속지 말자!”―11월 5일
“이 착취와 억압 체제는 12일의 위력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멀쩡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성과연봉제 폐지, 사유화 중단, 사드 철회,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해체, 세월호 진상규명, 핵발전소 저지 등’ 노동인민의 삶을 개선할 당면 요구들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민주당 등 야3당은 이 요구들에 대해서는 따로 셈하자며 낯빛을 바꿀 것이다.…이 투쟁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노동계급이 자본가 정당들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박근혜 타도와 더불어, 민주당 등 자본가 정당들이 이 ‘헬조선’의 원인이고 조력자이고 공범자라는 각성을 촉진하는 것이 이 싸움에서 노동계급의 주된 임무 중 하나이다.”―11월 19일
“이 사회는 계급적대를 중심 갈등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노동인민의 일터에서 나타나는 생존권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투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인민이 주도권을 놓지 않을 때라야만 자본가 정치인 일부가 따라오려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다. 거듭되는 패배는 거의 대부분 바로 이점 때문이었다. 노동인민이 계급적으로 각성하지 않는 것, 그리고 ‘노동, 혁명, 변혁’ 등을 주장하는 정치조직들마저 그 각성을 흐리고 계급협조에 참여하거나 방조하는 것이다.”―12월 10일
우리는 소수의 사회주의 선전그룹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무책임한 몽상가가 아니다. 우리는‘노동자정부’와 ‘혁명정당 건설’을 지금의 역관계 속에서 당장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계급적 각성의 중요성과 앞으로의 목표를 분명히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 역시 분명하게 이야기해 왔다.
“노동자는 공동체, 환경, 성평등, 인종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가장 친화적인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자 정부를 통해서만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더욱 악화시킨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그럴 기반은 지금 당장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정치노선을 지니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혁명적 노동자당이 우리에게 없다.”―11월 19일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를 통해서만 인민의 평화롭고 유복한 삶이 보장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급적 이해에 온전히 복무하는, 노동계급과 인류의 역사적 실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계승한 노동자정당이 필요하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며 멀고 험난하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다.”―12월 10일
당면 과제와 장차의 목표 사이에 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달리 말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그때그때 우리의 행위가 원칙과 목표에 이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자와 후자는 일직선의 시야 속에 함께 들어와야 한다. 마치 농구선수가 공과 골대를 일직선 위에 놓고 슛을 하듯이. 둘 중 하나에 치우쳐 근시나 원시가 되면, 양 극단의 기회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박근혜 퇴진과 더불어 성과연봉제 폐지, 사유화 중단, 사드 철회,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해체, 세월호 진상규명, 핵발전소 저지 등’의 당면 과제를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그것들이 노동계급적 이해와 전략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시기에는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같은 요구를 결코 내걸지 않아야 하고, 다만 ‘민주적 권리 요구’로 우리의 투쟁을 제한하여야 한다고 선생은 믿는다. 이런 패배적이고 대중추수적 결론에 권위를 부여해 보려고 위대한 맑스주의 공동 창시자 엥겔스를 오종종한 민주주의자로 소환하여 인용하지만, 현재의 당면과제와 궁극적 목표의 일치라는 문제는 사실 너무도 기초적인 삶의 지혜이다. 독자들은 다음의 일화만으로도 이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마는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초설에 붙여서」, 류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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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현재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조직적 역량으로는 분명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목표들(선생)”인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등은 결코 제기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당면의 과제・요구”는 오직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파쇼악법들과 그 제도・기구・관행・인물들을 폐지・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학문・언론・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 즉,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물론 국가보안법 철폐로 대표되는 민주적 권리 획득 투쟁은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국가보안법 철폐를 쉼 없이 주장하였고, 1995년 남한국제사회주의자(현 노동자연대) 사건, 2006년 일심회 사건, 2013년 내란음모 조작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등에서 그 피해자 편에 서서 국가폭력에 맞서 싸웠다. 2017년 1월 6일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 구속 이후엔 국가보안법 철폐와 이진영대표 석방 투쟁에 상당한 역량을 투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민주적 권리 획득” 투쟁 역시 전략적 목표 아래에 배치해야 한다.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근본원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요구를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이라는 요구와 맞세우고, 전자가 성취된 뒤에나 비로소 제기할 수 있는 과제로 후자를 유보하는 것은 맑스주의가 아니며, 모든 악의 원흉인 자본주의 지배자들을 은폐하는 계급 이반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정치꾼들, 부르주아 정당들의 저러한 약속을, 민주주의를 철저화하겠다는 저러한 약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야 하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하자는 선생의 주장은 결국 또 민주주의 파괴자인 자본가계급 정치인들을 민주주의 구원자로 만드는 것이다. 버릇처럼 반복되는 ‘계급협조주의’이다.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맙고 편리한 노선이다.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을” 침해하면, 자신들의 명운을 위협하는 ‘노동자정부’ 요구나 ‘혁명정당 건설’ 작업을 미루고, ‘그럴 듯해 보이는’ 자본가 정치인 꽁무니나 좇게 만들 수 있으니.
선생은 이런 노골적인 “2단계 혁명론” 비판에 대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을 좌익적 언사로 포장하여 떠들어대는 데에는 유달리 유능한 ‘혁명가들’의 비난”이라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그 비판이 “독점자본의 악질적 반공모략”이라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모든 비판을 ‘종북’ ‘좌빨’로 모는 어떤 지배집단의 행태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진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이렇게까지 끓어오른 에너지가 문제의 근원으로 향하는 것을 한사코 가로막는 것을 보면서 그 독점자본이 상당히 기특해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쓰딸린주의적 2단계 혁명론”이 해롭고 위험한 노선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또 다시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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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프로이센의 군사 문제와 독일의 노동자당」, 엥겔스, 1865년).”의 인용은 적절한가? 1865년 엥겔스의 정신과 2017년 선생의 정신은 같은 것인가?
선생은 자신의 패배주의적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엥겔스를 인용한다. 맑스주의의 위대한 창시자 엥겔스는 그렇게 불려 나와 “스딸린주의 2단계 혁명론”의 증인이 된다. 선생의 주장은 이렇다: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지금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을 제기하는 것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자들의 주장이다. 지금은 민주적 권리 획득에 전념해야 한다. 그 민주적 권리가 확보된 뒤에 노동자운동 즉, 노동자정부나 혁명정당 운동을 전개하자.’
엥겔스의 저 명제를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등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하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선생의 해석처럼, ‘혁명정당 건설과 노동자정부 등 계급적 요구는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의 확보 뒤에나 가능하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선생의 해석은, 1865년 프로이센과 2017년 한국이라는, 사회구성체의 성격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엥겔스의 위 문장은 1865년 「프로이센의 군사 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때는 프로이센 ‘왕정’ 시대였다. 사회의 주요계급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이 아니라, 봉건 반동과 자본가계급이었다. 봉건왕정이 지배하고 있었고, 부르주아적 권리인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 보통 선거권’ 등이 제도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런 조건에서 부르주아는 새 시대를 열 진보적 계급이었다.
그리고 봉건체제의 분쇄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주장을 분명히 하기 위한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 시기에 부르주아의 이해와 노동자의 이해는, 봉건 반동이라는 공적(公敵)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보통 선거권, 공화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두고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엥겔스는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반동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승리는 언제나 한편으로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승리이기도 한 바, 그것은 자본가 지배의 종국적 붕괴에 기여하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할 시기를 더욱 앞당긴다.”
그리고 이어서 엥겔스는 ‘보통 선거권과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 등’ 부르주아적 권리 투쟁 즉 “민주적 권리” 투쟁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만약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에 충실하지 않게 된다면,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그로부터 나오는 원칙을 배신한다면?…하나의 길은,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는 것, 즉 가능한 한 그들을 강제하여…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에게 ‘요구’하고 부르주아를 ‘강제’한다. 왜? 그 요구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부르주아적’ 요구이고 그 요구를 실현하는 것은 그들 부르주아의 계급적 필연이기 때문에. 1865년 프로이센에서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이고 노동계급적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자본주의가 세계화된 지 100년도 더 넘어 썩어문드러져 있는 2017년 한국에서, 봉건‘왕정’이 아직도 건재하던 시절의 태도를 반복하라고 가르친다.
“부르주아 정치꾼들, 부르주아 정당들의 저러한 약속을, 민주주의를 철저화하겠다는 저러한 약속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야 하고, 그 약속들을 이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저 헌법 제37조의 개폐(改廢)를 요구하고 강요해야 한다.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자유와 권리의 실질을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일체의 반민주적・파쇼적 법률의 개폐와 그 제도・관행・기구・인물들의 폐지・척결을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저들은 자신들이 헌법전에 써놓은 사상・학문・언론・집회・결사・통신의 비밀의 자유 등등을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보장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 자유와 권리는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요구일 뿐 아니라 본래 (소)부르주아의 자유이고 권리이자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일 뿐더러,…이러한 조건들, 이러한 기간을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은 저들에게 민주주의를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강요해야 하며, 선진노동자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노동자들에게 기필코 각인시켜 내야 한다.”
헌법을 준수해달라고 부르주아들에게 얼마나 조아리는지 보기 민망할 정도이다. 150여 년 전의 엥겔스는, 봉건왕정 치하의, 부르주아가 “새로운 시대의 아들(엥겔스)”이었을 때, ‘보통 선거권, 공화제, 민주적 제 권리’는 아직 독일 사회에 등장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노동계급에게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숨기지 말 것을, “부르주아 뜻에 상관없이” 계급적 독립을 지키고 그것을 강화하며 부르주아지 앞에 당당할 것을 가르쳤다.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밖에 없다.…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있어 노동자 당이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꼬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당파로서 행동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노동자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는 자본가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에 맞서 자신의 조직을 확고히 유지하는 한편 계속 단련시킬 것이며,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과 교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만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과 교섭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 당은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개별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 이해에 눈뜨게 할 것이며, 혁명의 폭풍―그리고 이 폭풍은 상업 공황이나 춘분․추분 시 폭풍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회귀를 하게끔 되어 있다―이 불어올 때에는 행동 태세를 완비해 놓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엥겔스의 이런 계급적 각성과 기개(심지어 봉건시대에!)는 배우지 않고,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그렇게 거듭 조아리던 선생이지만, 노동계급에게는 이렇게 매몰차게 세뇌한다:“반드시 민주주의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노동자들에게 기필코 각인시켜 내야 한다. 강조하거니와,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주어지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말라는 듯이! 이 부르주아 체제 속에 ‘가만히 있으라!’고.
‘민주주의’는 아직 획득되지 않은 미래의 과제인가? 천만에! 1865년에 엥겔스가 말한 그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정치체제와 권리’들은 이미 백년도 더 전에 획득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세계 ‘모든 곳’에서 자신들의 ‘보통 선거권, 공화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고 확립했다.
국가보안법이 있으니 한국은 아직 아니지 않느냐고? 천만에! “헌법전에 써 놓은” 것처럼 이 체제는 이미 ‘민주공화국’이다. 빛 좋은 개살구일지라도, 부르주아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자신들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엥겔스)” 보장되었다. 특히 부르주아에게! 지난 20주 동안 우리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수십 년 이래 최고치로 누렸다. 그리고 마지못해서였지만, 이 체제는 그것을 합법이라고 인정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기대하고, 만족스러운 수준의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면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니 당장은 민주주의 투쟁에(만) 집중하라는 생각은 맑스주의가 아니다. 부르주아에 굴종하는 민주주의 물신론자의 생각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통치 질서’를 의미한다. 피억압인민에게는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참아줄 만한 수준만큼”만 보장된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여겨지는 미국이, 자국에서조차 얼마나 심각하게 인민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침해하는지를 보라. 테러방지법이 대표적이다. 서유럽이나 북유럽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 지배가 확고할 때 그들은 여러 자유조치들을 내놓으며 민주주의를 확대한다. 왜냐 하면 갈등 조정 비용이 가장 싸게 드는 효율적 국가운영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할 경우 주저없이 거두어들인다. 파시즘은 그 극단의 형태이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의 근본적 이해 추구를 유보하고, 다시 ‘민주주의자’로 돌아가서 ‘민주주의 회복(결국 자본주의의 회복)’을 위해 부르주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네 번째 논의를 매듭 짓자. “언론의 자유, 결사 및 집회의 자유가 없이는, 어떠한 노동자운동도 불가능하다.”라는 명제는 1865년 프로이센 봉건왕정시대의 노동계급에게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150년도 더 지난 지금, 썩어문드러진 자본주의시대인 지금도 그 명제를 여전히 교조적으로 떠받들며, 전자가 충족되지 않으면 후자, 특히 ‘노동자정부’ ‘혁명정당 건설’ 등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것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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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
첫째, ‘촛불혁명’・‘시민혁명’을 지배계급의 일부가 ‘촉발’한 것은 맞지만, 그들이 의도적으로 ‘기획 연출한 것’은 아니다. 지배계급의 모순적 행위 역시 계급 사회 동학(動學)의 일부이다.
둘째, 박근혜 퇴진 투쟁의 요체는 계급적 각성이다. ‘노동자정부’는 그 지향점이고, 그를 위해 ‘노동자 혁명정당 건설’은 지체할 수 없는 과제이다.
셋째, ‘당면 과제와 요구’를 ‘민주적 권리 획득’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환상에 기초한 것이고, 결국 ‘계급협조주의’로 이끄는 해롭고 위험한 노선이다.
넷째, 채선생의 엥겔스 인용은 사회구성체마저도 이질적인 전혀 다른 두 상황을 동일시한 무모한 인용이고, 결국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나중’이라는 계급 배신적 ‘단계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조류 내 채선생 지지자층을 포함하여, 노동계급의 역사적 대의를 먼저 깨달은 선진활동가들이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연구해 주길 기대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