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시즘 2012’ 참관기  

 

정치포럼 ‘맑시즘’

‘맑시즘 2012’가 7월 26일(목)부터 7월 29일(일)까지 개최되었다.

주최 측의 발표(총인원 수, 각 강연에 대한 강연록과 녹음이나 영상기록 등의 공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가 없으므로 주먹구구로 추산해 보면, 하루에 약 2~300명가량 연인원 1000명을 훌쩍 넘는 학생 노동자 활동가들이 모여, 4일 동안 50여 개의 강연에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사회주의 정치 공론장으로 남한 최대 규모의 행사라 할 만하다.

노동계급의 성장은 그 의식의 성장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의식의 성장은 선진노동자 또는 활동가들을 통해 일차적으로 실현된다. 또한 노동현장 안팎의 계급투쟁과 더불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문제를 둘러싼 정치 논쟁을 통해 그 성장은 촉진된다.

그런 점에서 12년 동안 매년 치러졌다는 ‘맑시즘’ 행사는 남한 노동계급의 정치의식 성장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인정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의미 있는 행사를 꾸준히 조직해 온 다함께에 고마움을 표한다.

 

참가한 네 가지 강연과 참관기

나는 행사기간 4일 중 26일(목)과 28일(토) 이틀만 참가했다. 26일에는 ‘혁명가들과 그 고전들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김태현, 오후 3:00~4:20)’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최미진, 오후 4:50~6:10)’을 선택하여 들었다. 그리고 28일에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동아시아는 어디로?(김하영, 오후 2:30~3:50)’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의 경제·정치 위기와 저항(소티리스 콘드지아니스, 4:10~6:00)’을 들었다.

이 강연들을 들으며 핵심을 요약했고, 청중토론을 이용하여 질문과 발언을 했고, 연사의 정리발언과 다함께의 다른 활동가를 통해 그 반응을 확인했다. 그 내용들을 토대로 이 네 가지 강연에 대한 비판적 감상을 참관기 형식으로 차례로 작성 제출하고자 한다. 이 참관기가 ‘맑시즘’ 행사를 비롯한 정치 토론 문화의 발전과 남한 노동계급 정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맑시즘 2012 참관기 1: 혁명가들과 그 고전들 레닌의 <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

 

맑시즘 2012’ 참관기 2: ‘ 맑시즘 ,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맑시즘 2012’ 참관기 3: ‘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 ? 동아시아는 어디로 ?’

 

맑시즘 2012’ 참관기 4: ‘ 오늘날 그리스의 경제 · 정치 위기와 저항

 

 

‘맑시즘 2012’ 참관기 1: 혁명가들과 그 고전들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강연 요지

강연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전적으로 메모와 기억에 의존한 요약이다. 다르거나 왜곡이 있다면 지적해 주길 바란다.)

“기존의 번역 표현인 《공산주의 좌익 소아병》보다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 원래 저작 취지에 더 충실한 표현이다.

1920년 4월에 발표된 이 저작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위한 논쟁적 저작이다. 1919년 1차 회의에 비해 1920년 7월~8월에 열린 2차 회의는 40여국을 대표하는 6~70개 조직이 200여명의 대표를 파견한 명실상부한 코민테른 대회였다. 당시 독일에는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고, 초좌익 분파의 문제가 나타났다. 2차 대회의 핵심 논점은 3가지였는데 그것은 첫째, 중도주의와 그에 대한 혁명정당의 역할 둘째, 무정부주의에 대한 대응 셋째, 초좌익과 전술의 운용 문제 등이었다.

초좌익은 ‘의회 거부, 노조 거부, 전술 사상에서 어떠한 타협에도 반대, 전술을 전략으로 격상하는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이들에 대해 설득적 자세로 논쟁에 임했다. 물론 “우익교조주의가 이들에 비해 100배나 위험하다.”는 말로 투쟁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했다.

한 입으로 두 말하기는 레닌의 특징이다. 즉, 1903년에 레닌은 사회주의 사상은 외부로부터 온다고 했었다. 하지만, 레닌은 1905년에 노동계급은 태생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상반되게 말한다. 또한 1917년 4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해 7월 임시정부 타도를 내걸고 노동자들이 봉기에 나서자 볼셰비키는 그 노동자들을 제지했다.

내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의 교훈은 다음 4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 고정불변의 입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불가피한 타협과 원칙 훼손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과거 NL은 PD와의 논쟁에서 자신들의 인민전선 전술을 합리화하기 위해 레닌의 이 책을 이용했는데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3. 기권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이다. 즉, 노동조합과 의회에 대해 개입하기를 거부하거나 촛불정국과 그 이전 노무현 탄핵 정국 등에서 기권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4. 작위적 도식에 현실을 꿰어 맞추지 말아야 한다.”

 

청중토론과 발언

강연자의 강연 이후 대략 20분 남짓 청중 토론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 당 3분 30초의 발언 시간이 주어졌고, 시간을 넘기면 마이크가 꺼졌다.

발언권을 신청해서 다음과 질문과 발언을 했다. (발언 시간의 제약 때문에 살을 붙이기는 어려웠다. 쫓기듯이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는 뼈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원래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핵심 내용의 변화는 없지만, 실제 발언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수 있다.)

“‘한 입으로 두 말하기의 명수’로 레닌을 소개하는 것은 흥미를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위험한 왜곡이다. 연사는 두 가지를 그 예로 들었는데 둘 모두 잘못된 예이다.

먼저, 연사는 1903년에 “사회주의 사상은 외부로부터 온다.”라고 말했지만, 1905년에는 “노동계급은 태생적으로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상반되게’ 말한 것이 그 예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둘은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외부로부터 온다.”라는 1903년의 발언은 특정 시/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가는 특정 국가의 노동계급은 인류의 역사적 실천을 통한 과학적 인식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을 자동적으로 즉, 자기의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 획득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전위인 당을 통해서만 특정 시/공간의 노동계급은 인류의 역사적 실천의 총화로서의 사회주의 사상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계급은 태생적으로 사회주의자이다.”라는 1905년의 발언은 연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태생적으로(자생적으로)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의 첫 명제인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처럼, 자신의 객관적 처지로 인해 사회주의의 지향과 본질적으로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명제는 강조점이 다른 것이지 상반된 것이 아니다.

둘째로 연사는 1917년 4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주장해 놓고 그 해 7월 임시정부 타도를 내걸고 노동자들이 봉기에 나서자 레닌은 그 노동자들을 제지했으므로 ‘한 입으로 두 말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자는 레닌이 제기한 볼셰비키의 정치적 방침이었고, 7월에 봉기를 제지한 것은 그 원칙을 부정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봉기를 수행할 만큼 유리한 역관계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의 원칙은 견결히 지켜졌고, 처음에는 그 슬로건을 외면하던 러시아노동자들이 정세 변화에 따라 그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볼셰비키는 드디어 압도적 다수가 되었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봉기로 집행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가지 예로 레닌을 ‘한 입으로 두 말하기의 명수’로 소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위험한 것이다.

그 반대로 오히려 레닌은 핵심적 원칙에 대해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한 혁명가였다. 특히 그의 전위당 노선과 관련한 핵심적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이다. 기회주의와 분립할 것, 자본가 정당과 단절할 것, 강령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당을 건설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원칙에 있어서 레닌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타협적이었다.

먼저 기회주의와 분립이다. 레닌은 1912년 노동계급 내 기회주의 조류인 멘셰비키와 최종적으로 분립했는데, 이 정책은 러시아 혁명의 또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트로츠키마저도 1917년에 와서야 그 옳음을 인정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둘째로 자본가 정당과 단절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임시 정부에 대해 많은 고참 볼셰비키들은 비판적 지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4월에 귀국한 레닌은 자본가들과의 연립정부였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 철회를 주장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제기했고, 볼셰비키 내에서 비타협적으로 싸워 당을 정치적으로 재무장한 끝에, 결국 6개월 후 권력을 장악했다. 만약 레닌이 당시 볼셰비키의 다수 견해였던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에 굴복했다면, 10월 혁명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강령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당 건설 원칙이다. ‘스스로를 사회주의 조직으로 간주하는 모든 정치경향들은 단일한 당으로 결집해야한다.’는 카우츠키까지의 정당론은 제국주의 상호 전쟁과 사회국수주의 물결에 빠져든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로 인해서 파산했고, 레닌은 그 이후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관점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것을 우리는 레닌의 전위정당론이라고 일컫는 것이고,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은 기회주의 사조와 분립하여 혁명 강령을 승인하는 인자를 중심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레닌을 ‘한 입으로 두 말하기의 명수’가 아니라, ‘원칙에 대한 비타협적 수호자’로 기억해야 한다.”

 

다함께 활동가와 연사의 답변과 그에 대한 반비판

다함께 핵심 활동가 몇이 나서서 내 발언에 대해 비판했고, 연사 역시 정리 발언을 통해 관련된 발언을 했다. 그 중 흥미로운 내용들을 소개하고, 반비판한다.

“이집트 대선에서 군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

-다함께는 남한의 각종 선거에서 김대중이나 조순 등 부르주아 좌파(자유주의 부르주아)에 대해 비판적지지 입장을 자주 개진해왔다. 그런데 인민전선의 하나인 부르주아에 대한 이 ‘비판적 지지’를 이집트에서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IS는 이집트에서 실제로 이 입장을 제출했다). 이 소위 ‘차악론’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립을 끝없이 지연시켜 왔다. ‘차악론’은 다가올 대선에서 또 활개 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계급협조주의 인민전선의 유혹을 단칼에 잘라버려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다함께가 선거 국면에서 취한 태도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인민전선에 대한 형식적 반대가 실천과 일치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당을 통해서 노동계급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서 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당은 노동계급과 분리되지 않는다. 노동계급 내에서 그 선진부위가 정치적으로 결사하면서 조직된다. 노동계급은 균일하지 않다. 의식/조직적으로 앞선 부위가 있고, 처진 부위가 있다. 당은 노동계급의 전위부대이다. 사회주의는 인류의 역사적 실천에 대한 총화로 수립된 과학적 사상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학습을 통해서만 계승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앞선 부위는 역사적 실천의 총화를 현재화시켜야 하고, 그 조직적 형태가 당이다. 사회주의 사상은 특정 시공간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는 노동계급의 즉자적 투쟁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위의 명제가 레닌의 전위 정당론을 대치하기 위한 시도라면 ‘노동자주의(조합주의)’로의 굴복에 다름 아니다.

“활동가는 대중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통진당은 대중이라는 물로 채워진 수영장이다.”

-대중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든, 혁명정당은 개입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은 대중조직이 아니다. 강령 즉,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결집된 정치조직이다. 노동계급은 정치적 종속을 통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다. 그 정치적 종속은 조직적 종속 즉, 선거 등 각종 정치 현장에서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하는 것 또는 노동계급의 조직이 분립되지 않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 반대로 노동계급 혁명의 기본 조건은 정치적 독립이며 그것은 조직적 독립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 정당과 일시적으로 같은 편에 서서 싸우는 특수한 경우(공동전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경우에도 노동계급의 조직적 독립은 사수해야 하는 것이다. 계급전선을 뛰어넘어서라도 대중적 지지가 있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 ‘레닌주의 유연성’이라면, 한국노총이 조직적으로 결합하고 내로라하는 민주노총의 과거 ‘투사’들이 참여했다는 민주당 역시 적극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통진당의 이데올로기와 지지 기반, 실천은 민주당과 다르다. 그들 속에서 검증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다르다. 하늘 아래 똑같은 것이 어찌 있겠는가? 하지만 맑스주의자는 기본적으로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라는 계급 전선을 기준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민주노동당은 최소한 조직적으로는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결합한 통합진보당은 다함께 스스로도 말했듯이 계급적 선을 넘은 인민전선인 것이다(“인민전선체의 정치적 파산을 보여 주다”, 레프트21, 2012 5월 24일).

“원칙에 충실한 자는 자신감 있게,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 있다.”

레닌이 무오류의 정치인은 아니어서, 오류도 저지르고 기존 입장을 수정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했겠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원칙에 대해서 한 입으로 두 말 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한 입으로 두 말을 자신감 있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단련된 사기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국공산당에게 레닌은 “영국노동당에 입당하라.”고 제의했다. 통진당에 못할 것이 무엇인가? 10% 지지를 상회하는 통진당이라는 기회를 왜 놓치는가?”

-여기서 다함께 운영위원인 연사는 통진당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레닌주의 ‘유연성’에 입각한 원칙인 것처럼 답한다. 그러나 1920년대의 영국노동당과 2012년의 통진당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다함께 스스로도 지적한 것처럼, 통진당은 자본가 정당과 결합한 인민전선 당이고, 영국노동당은 ‘부르주아 노동자당’(자본주의에 굴종하는 강령을 가졌지만, 최소한 조직적으로는 자본가 계급과 분리된 노동계급의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는 당; 사민주의 정당)이다.

이 강연이 있고 불과 3일 뒤, ‘맑시즘 2012’가 진행되는 마지막 날, 다함께는 긴급 대의원협의회를 소집하여 통진당 탈당을 ‘만장일치’로 전격 결정했다. 많이 늦기는 했으나, 올바른 결정이다. 그러나 성명서(“최소한의 혁신마저 불가능해진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한다.” 7월 29일)가 밝힌 탈당 이유는 인민전선과의 단절을 위해서가 아니다. “통합진보당 의원 총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제명안 부결”로 “노동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조차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4월 이후 통진당 내 자본가 분파, 모든 부르주아 언론, 검찰, 국회 등이 총동원된 공세로 조성된 지금의 정국에서, ‘인민전선 반대’를 내거는 것은 인기 없는 명분일 것이다. 그보다 ‘이석기·김재연 제명안 부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이 통진당 내 자본가 분파, 모든 부르주아 언론, 검찰, 국회 등이 총동원된 공세로 조성된 정국 속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기 훨씬 쉽다는 것을 ‘예민한 대중 감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 8월 19일

4인터

 

‘맑시즘 2012’ 참관기 2: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

시리아/리비아 강연

같은 시간 다른 강의실에서 ‘시리아, 리비아 그리고 인도주의 개입의 신화’라는 주제의 강연이 있었지만, 7월 26일 목요일 두 번째 강연은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4시 50분~6시 10분)’을 선택했다.

시리아/리비아 사태는 초미의 관심사이며, 이 문제는 누가 진정한 맑스주의자인지를 묻는 2011-12년판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2011년 4월 23일 ‘ 리비아 사태: 무지와 맹목, 혼돈에 빠진 ‘사회주의자’들’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고, 그 글에서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리비아 반군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세력’이라고 지지하며, 궁극적으로 리비아의 반동으로의 복귀와 제국주의 재식민지화에 기여한 다함께 등을 비판한 바 있다.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상황에서, 지금 시리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쉽지 않지만, 외신이 전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국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정부에 민주주의 세력이 맞선 투쟁’으로 일축할 수는 없다.

 

여성 문제를 선택한 이유

갈등을 겪다가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강연 제목 그대로 여성해방에 대해 맑시즘과 페미니즘이 어떻게 다른지, 진정 여성해방을 위해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특히 페미니즘이 마치 ‘변혁운동’의 한 조류인 것처럼 대접 받는 요즘의 남한 운동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개인적으로, 십여 년 전 IBT의 논문을 읽고, 여성 문제에 대한 시각을 정립할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논문의 제목은 이번 강연 제목과 똑같은 ‘ 맑시즘,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해방’이었다. 당시는 남한 여성운동이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았고(적어도 당시의 내 눈엔), 여성운동이라면 무조건 ‘진보운동’의 일부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몇 년 뒤 2004년 말, 소위 ‘진보운동’을 합네 하던 ‘여성주의자’들 대다수가 ‘진보의 옷’을 입은 채 부르주아 정당들과 손을 잡고 ‘여성억압의 원인을 남성 일반에게 전가하고, 하층 여성을 ‘여성 자매’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내며, 온갖 범죄의 근원인 자본주의 국가에 도덕적 심판자의 망토를 입히는’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주도하고 지지했다. 그 논문은 그러한 사태에 대해 정당하게 분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분노를 진전시켜, 사회주의 운동과 부르주아 여성운동(페미니즘)과의 단절을 촉구하는  성매매방지법과 노동계급(2005년 4월)을 썼고, 이후  노동계급의 여성해방운동을 위하여(2007년 6월)라는 글로 발전되었다.

 

많은 참가자와 잘 조직된 행사

이 강연을 선택한 참가자가 상당히 많았다. 자판기 냉음료를 뽑아들고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냉방이 신통치 않은 어지간히 큰 강의실을 참가자들이 절반 이상 채우고 있었다. 눈짐작으로 50명이 넘는 듯. 대다수가 여성이었지만, 남성도 1/4이 넘는 듯 보였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잘 조직되어 있었다. 강의실 문 안과 밖에서 참가자를 안내하고 주변적인 일들을 통제하는 두 명의 안내자, 강연의 시작을 알리고 청중토론을 단정하게 이끄는 사회자, 정해진 강연시간(40분)-청중토론(20분?)-연사정리발언(20분?)과 그것을 거의 지키는 진행, 청중 토론 시 발언자들에게 주어지는 3분 30초와 시간을 넘기면 꺼지는 마이크, 다함께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있을 때 연사를 도와 반박할 수 있는 중견 회원의 배치 등 세세한 목적의식이 눈에 들어왔다. 능숙하고 효율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점들은 다른 조직들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사든 청중 발언이든 시간의 엄수 문제.

 

강연 요지

사회자의 소개 발언 이후, 강연이 시작되었다. 다음은 그 요약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훨씬 열악한 처지에 있다. 각종 통계 자료들은 여성의 억압상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엥겔스의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은 여성 문제에 대한 연구에 크게 기여한 저작이다. 엥겔스는 “계급사회의 등장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낳았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 여성을 억압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해방시킬 의지도 없고, 자본주의 하에서 가능하지도 않다. 누군가가, 영국 의회에서 지금 속도로 남녀평등을 향해 나아간다면 2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달팽이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시간과 같다.

여성의 궁극적 해방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를 종식시킨 세계 최초의 노동자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사적 소유를 철폐했고, 여성 해방에 커다란 성과를 낳았다. 이혼 절차가 간소해졌고,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 실현되었고,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1960~70년대 미국 등에서 발전했던 페미니즘은 사회주의 운동 쇠퇴의 반영이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이론에 입각해 있다. 그리하여 “지배계급인 남성이 여성을 억압한다.”라거나 “남녀관계는 곧 노자관계이다.”와 같은 반동적 입장을 설교하며, 남성우월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계급적 구분을 뛰어넘는 자매애를 중요시한다. 계급적 구분을 뛰어넘는다면 인종적 형제애 강조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오바마나 그 부인 미쉘이 하층 흑인이나 하층 여성의 이해에 동조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층 흑인과 하층 여성의 이해를 침해하며 권리를 탄압한다. 이마트와 신세계를 경영하며 여성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건희의 딸들도 마찬가지이다.”

 

청중토론과 발언

발언권을 신청해서 질문과 발언을 했다. (여기 요약 정리하는 발언에 대한 입장은 참관기1에서 밝힌 것과 같다. 즉, 핵심 내용의 변화는 없지만, 실제 발언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수 있다.)

“훌륭한 강의 잘 들었다.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래서 관련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연사의 강연 내용에 대해 거의 대부분 동의할 수 있다. 여성 억압의 근원은 성별이 아니라, 계급적 장벽 때문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철폐할 때만이 궁극적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연사의 견해에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강연을 들으면서 잠깐 읽어보았는데, 『마르크스 21』 13호에 실린 연사의 논문 중 첫 번째 소제목으로 쓰인 “여성의 노동자화”라는 표현은 좀 의아하다. 그 소제목은 강연내용과 달리, 모든 여성의 이해가 같다는 것으로 느끼게 할 여지가 있다. 과거 ‘빈곤의 여성화’라는 분리주의적이고 어색한 조어를 연상케 한다.

연사는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다. “지금 속도로 영국 의회에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200년이 걸린다. 그것은 달팽이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시간과 같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 비유를 지지하면서, 덧붙이고 싶다. 만리장성 완주에 대한 달팽이의 의지를 믿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본가계급에게 남녀평등의 의지가 있다는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다. 여성억압은 자본주의 계급억압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연사는 또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후진적인 러시아의 여성해방의 수준을 한 순간에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만들었다.” 그 지적 또한 동의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고 싶다. 러시아의 여성해방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혁명지도자들이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여성억압의 ‘물적 토대’인 자본주의 즉,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적소유의 철폐는 여성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이며 핵심적인 교두보’이다.

그런데 사적 소유의 철폐와 그로 인한 여성해방의 급신장은 러시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차 대전 직후 동유럽과 북한 그리고 1949년의 중국, 이후 쿠바 베트남 등에서 기존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패배나 게릴라 전쟁 결과 제국주의 하수인 정권이 패배하고 자본가 권력이 붕괴되었을 때, 그 나라들에서도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되었고, 러시아 혁명 때와 비슷한 여성해방의 성과들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동유럽과 소련이 붕괴되었다. 사적소유가 복귀되었고 자본주의가 부활했다. 그 사건은 모든 인민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재앙이었다. “의식주가 안정적으로 해결되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가 제공(유엔 자료)”되던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복귀되자, 인구증가율은 –5.8%가 되고, 자살률은 2배로 증가했다. 남성의 평균연령은 63세에서 58세가 되었다. 2003년 당시 남한의 자살률이 OECD내 1위였다는데, 세계를 통틀어 살피면, 러시아가 1위이고 헝가리 폴란드 등 자본주의가 되살아난 지역 나라들이 그 뒤를 따른다. 가정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들이 크게 늘었다. 매춘이 대규모 부활했다. 하층 여성들이 전세계로 팔려 나갔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여성 억압의 근원을 계급적 차이가 아니라 성별에서 찾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체제의 한계를 넘어 여성해방을 진전시키려는 맑스주의자라면, 사적소유의 철폐를 추구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루어낸 그 성과들을 방어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여성해방주의자라면, 소련을 포함하여 위에서 언급한 사회들의 성격과 그에 대한 태도 문제가 여성문제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청중토론 이후 연사의 정리발언

대여섯 명이 청중토론에 참여했고, 이후 정리발언을 했다.

“‘맑시즘은 계급환원론이다’라는 오명은 스탈린주의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 혁명의 성과를 빼앗겼다. 혁명의 성과는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다. 스탈린 집권 이후 많은 것이 후퇴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전제로 한다. 여성해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닌은 그러한 후퇴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미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랬다. 스탈린의 집권은 이전과 엄청난 단절을 의미한다. 새로운 종류의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도 일정한 의의가 있고, 우리(다함께)는 그들과 공동 활동과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낙태문제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계급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낙태가 불법이 되었을 때 모든 여성들이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상층 여성들은 어떻게든 돈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낙태로 죽은 여성들은 주로 흑인이나 제3세계 여성들이었다. 미국 페미니즘이 성한 것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침체 때문이었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민주당에 의존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한편 민주당은 공화당과 타협했다.

중국, 북한, 쿠바 등을 사회주의라고 말하는데, (“사회주의라고 말하지는 않았고, 노동자국가라고 했다.”라고 하자) 그러면 조금 헷갈린다. 어쨌든 나는 사적소유가 철폐된 사회라고 해서 사회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많은 기업을 국유화한 박정희 정권이 사회주의정권인가?”

 

몇 가지 쟁점들

1. 스탈린관료집단은 혁명의 성과를 ‘모두’ 훼손했고, 그로 인해 소련은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으며, 여성해방의 성과는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갔는가?

물론 1924년 레닌 사후 권력 투쟁에서 트로츠키 좌익반대파에 승리하여 스탈린관료집단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소련 사회는 크게 후퇴했다. 그렇지만, 혁명의 성과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종류의 자본주의 국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철폐된 사적소유가 부활되지 않았고, 사적소유 철폐를 통한 성과는 유지되었다. (사회성격 문제를 ‘전면적으로’ 따지는 것은 오늘의 논점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참고자료 하나만 소개한다.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국가와 혁명’: 국가자본주의론 비판)

여성 문제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스탈린 관료집단은 여성문제를 크게 훼손했다. 이 후퇴와 그 원인 그리고 그 후퇴에 대한 관료집단의 대응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한다.

“불행하게도 소련 사회는 너무 가난하고 문화수준이 낙후했다. 국가의 실제 자원은 공산당의 계획이나 의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가족은 “철폐”될 수는 없으며 더 좋은 형태로 대체되어야 한다. 여성의 실질적 해방은 “일반화된 궁핍” 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이미 80년 전에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이 엄격한 진실은 경험에 의해 입증되었을 뿐이다.…

참기 어렵고 모욕적인 가정생활의 어려움이 사회 전체의 노력에 의해서 제거된 진정한 사회주의 가족은 어떤 강제적 통제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가정 내에서는 낙태법과 이혼법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춘굴이나 인간 제물 사원을 생각하는 것만큼 끔찍스러울 것이다. 10월 혁명의 법률들은 이러한 가족을 창조하기 위해 대담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경제적·문화적 후진성은 잔악한 반동을 초래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의 법률은 이제 부르주아 법 모델로 후퇴하고 있다. 그리고 이 후퇴는 “새로운” 가족의 성스러움에 대한 거짓 연설로 위장되어 있다. 이 문제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의 실패자인 소련 지배층은 위선적 품위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배반당한 혁명』 제7장 소련의 가족, 청년, 문화

크게 후퇴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 이전으로 즉, 자본주의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1917년 혁명의 성과는 1991년 붕괴 직전까지 뚜렷이 남아있었다.

“1990년대 이전에 중동부 유럽 그리고 구소련(지금의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은 높은 수준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인민에게 제공하여 주목을 받았다.…완전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다. 현금 수입은 적었지만 안정적이고 변동이 없었다. 수많은 기본 소비재와 서비스는 국가 보조금을 받아 공급이 규칙적으로 유지되었다. 의식주 문제는 안정적으로 해결되었다.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보장되었다. 퇴직자들에게 연금이 보장되었고 많은 종류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으로 이들은 정기적인 혜택을 누렸다.”–[유엔개발프로그램]의 1999년 연구보고서–IBT, ‘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에서 재인용

토니 클리프 등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1991년에 ‘국가자본주의가 사적자본주의로 바뀐 게걸음이 있었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반혁명이었고 재앙이었다.

박노자는 인민에게 닥친 그 재앙을 이렇게 증언한다.

“자본화된 러시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분노밖에 없습니다. 과거 소련에선 학교 옆에 유도 도장, 그 옆에 역도 도장, 그 옆에 도서관이 있는 식으로 공공시설이 많았어요. 독서문화가 활발했고, 가난해도 서로 비슷한 처지여서 행복했죠. 그런데 지금 러시아는 지옥입니다.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제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연금으로 생활합니다. 연금이라고 해봐야 ‘고기 한 점 살 수 없는’ 수준이고, 언제 수돗물이 끊길지 모르는 슬램 아파트에서 연명하는 신세예요. 이런 나라를 보고 정말이지 실탄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경향신문, 2010년 11월 15일

자신들의 잘못된 도그마를 위해, 버젓이 살아있는 이런 구체적 현실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2. 중국, 북한, 베트남 등에선 여성해방에 진전이 있었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은 ‘사적소유가 철폐된 자본주의’ ‘상속할 수 없는 사유재산’ ‘개인적으로 처분할 수 없는 사유재산을 가진 자본가계급’ 등 비과학적 주장을 늘어놓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유재산, 계급, 자본가 등 맑스주의 핵심 개념들을 수정하고 왜곡한다. 이 소위 ‘이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성적 인식을 저지하고 마비시킨다.

여성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을 고수하기 위해서, 북한 중국 쿠바 베트남 등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실증적이던 연구자는 국가자본주의론이라는 도그마 앞에 서자 갑자기 구체적인 현실을 외면하면서 도그마의 컴컴한 그림자 뒤로 숨어버린다. “사적 소유의 철폐가 그 나라들에 있었고, 그로 인해 여성 해방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해, ‘그럴 리 없다.’며 눈과 귀를 가리고 막무가내로 도리질을 한다.

중국과 관련해서만, 몇 개의 글을 소개한다. ‘1949년 중국 혁명-여성해방-시장 개혁’ 이 세 가지의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중국, 남녀평등’으로 구글링하면 첫 번째나 두 번째 페이지에 뜨는 글들이다.

“1949년 마오쩌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집권한 후, ‘하늘을 떠받치는 절반 인구 여성’의 지위향상을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 정책으로 설정하고부터 중국여성의 지위는 획기적 발전을 이루었다.…양성평등의 간판 아래 시행된 여성정책이 중국여성의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성평등을 위해서는 제도개선과 더불어 사회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지만 현실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중국의 경우, 남성의 61.6%, 여성의 54.8%가 전통 성별분업을 당연시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수치가 2000년도에 비해 각각 7.7%와 4.4%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계획경제 시기에 양성평등 정책의 보호 아래 고용과 임금에서 실현되던 뿌리 없는 형식적 평등마저 자유경쟁 체제에서 후퇴하고, 이에 상응하여 사람들의 의식도 전통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중국여성 10명 중 9명, “남성도 당연히 가사노동 해야”, 페미니스트 웹진 이프, 이영자, (강조 추가, 이후 마찬가지)

이 글에 따르면, 1949년 중국공산당의 집권 이후 “중국여성의 지위는 획기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낮은 생산성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에 실패하자 ‘개혁 개방’ 정책으로 돌아섰고 체제 내 자본주의적 요소의 성장은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자, 위 글의 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계획경제 시기에 양성평등 정책의 보호 아래 고용과 임금에서 실현되던 뿌리 없는 형식적 평등마저 자유경쟁 체제에서 후퇴하고, 이에 상응하여 사람들의 의식도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여성신문도 1949년 혁명 이후의 중국과 여성해방의 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라서 여러 가지로 안 좋다고 말하지만 남녀평등에 있어서는 오히려 중국이 한국보다 앞선다.…사회주의화 후 중국에서는 ‘여자는 하늘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말이 일반화되어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를 더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양성평등, 한국이 중국에 뒤져’, 박혜영, 여성신문, 2010년 8월 20일

오마이뉴스의 2001년 3월 8일 기사 ‘3.8세계여성의 날을 계기로 보는 중국여성들의 현황: 중국여성들은 새로운 ‘평등과 자유’를 원한다(박현숙)’를 통해서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그 글은 여성해방과 관련하여, 1949년 이후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9년 사회주의 신중국 건립 이후, 새로운 ‘혼인법’ 반포를 시점으로 해서 이들 중국여성들은 구시대에서 받아왔던 온갖 억압과 불평등에서 벗어나 사랑과 결혼의 자유를 비롯해서 여성들의 자주적인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법적으로 보장된 형식적인 남녀평등의 논리에 비추어보더라도 이들 중국여성들이 누리고 있는 평등의 정도는 세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전혀 손색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개혁 개방 정책’은 지난 30여 년 간 ‘사회주의적’ 소유를 갉아 먹어 “1980년대에는 국영기업이 중국의 비(非)농업생산을 거의 전부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30%로 하락했다(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 IBT).” 그 반대급부로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급증하였다. 그러자 남녀평등은 크게 후퇴했다. 그 변화의 일단을 위 글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90년대 이후 중국에서 가정폭력이 눈에 띄게 빠르게 증가하고…이것 역시 무슨 ‘개혁개방의 부작용’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위에서 든 가정폭력의 문제 외에도, 개혁개방 이후 증가하고 있는 여성의 ‘성상품화’ 경향, …다이어트 열풍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사회적 압력들은 현재 중국사회의 여성상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더군다나 최근 몇 년 사이 국유기업에 대한 개혁이 강화되고 시장화 경제정책이 추진되면서 소위 샤강(下岡, 강제해직) 대상자들의 1순위가 바로 40세 이상의 여성들이 되었다고 하니 이들 중국여성들도 더 이상 법적인 평등권 보장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같은 글

이러한 내용들은 ‘여성 해방은 자본주의적 소유양식이 철폐될 때 급신장된다. 반면, 자본주의적 소유가 부활되거나 증가될 경우 크게 후퇴한다.’라는 명제가 올바르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결과로서의 남성우월주의를 그 원인인 생산관계와 동렬의 것으로 취급하는 페미니즘의 반동성도 문제이지만,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인해 기껏 물려받은 맑스주의의 유산을 가지고 절반만 옳은 소리를 하는 것도 역시 안타까운 것이다.

2012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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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 2012’ 참관기 3: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동아시아는 어디로?’

중국 문제

살이 익을 듯이 뜨거운 토요일 한낮이었다. 두 개의 강연을 들으려고 참가했는데, 첫 번째는 다함께 운영위원 김하영의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동아시아는 어디로?’ (7월 28일 토요일 오후 2:30~3:50)이다.

참관기 2편에서도 이야기를 했듯이, 소련 문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중국 문제는 노동과 자본 진영이 정치/군사/경제/이데올로기 모든 면에서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전선이다. 지금 중국에 전 세계의 계급적 압력이 집중되고 있다. 노동계급은 이 문제를 올바르게 해명해 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26일(목)의 ‘중국 자본주의와 위기’를 놓친 것은 아쉬웠다. 가능하다면 그리고 녹취록이나 녹음 등이 있다면, 공개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연사의 발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고전적 제국주의 갈등이다’

연사는 중국을 겨냥한 미국-일본 그리고 한국 등 기타 관련 국가들의 군사적 적대행위, 중국의 경제적 성장 등을 20종이 넘는 도표와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강연을 진행했다.

“남사군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필리핀 사이에 갈등이 있는데, 이를 구실로 미국, 호주, 일본, 한국 등이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에 미국은 “미-일 안보조약 범위 내에 있는 사안”이라고 공언했다. 서해에서 수시로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등.

중국 경제력이 급격히 성장했다. 미국의 GDP 비중이 세계 25%에서 23%로 하락할 동안, 중국은 2%에서 9%가 되었다. 세계 제1위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동시에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2011년에는 1300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하여, 군사비 많이 쓰는 나라로 미국에 이은 2위 국가가 되었다.

미국-일본과 기타 관련국들의 군사적 적대행위에 맞서 중국-러시아 군사협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력은 압도적인 세계 1위이다. 미국은 군사비 많이 쓰는 나라 나머지 2위부터 15위까지 다 합한 것보다 많은 군사비를 지출한다. 그러므로 ‘중국 위협론’은 과장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동아시아에는 고전적 제국주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실천적 결론

세계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의 의도에 이끌려 군사동맹 강화, 군비 증강 등에 한국이 이끌려 들어가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중국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의존하지 않아야. 어느 한편을 편드는 것은 도움 되지 않는다.

제국주의-자본주의 동역학 자체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중국은 ‘제국주의’이고, 중국-미국의 갈등은 “고전적인 제국주의 갈등”인 것인가?

(다음은 청중발언을 토대로 한 의견의 정리이다.)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잘 조직된 강연이었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의식이 있다.

먼저, 연사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에 대한 것이다. 연사는 제국주의를 단순하게 ‘힘이 센 나라’를 의미하는 것처럼 설명한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화와 금융자본의 지배, 생산성의 우위에 기초한 초과이윤의 수취, 초과이윤 안정적 수취와 새로운 초과이윤 수취 지역의 배타적 확보를 위해 군사적/정치적 우위 추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갈등은 바로 그 초과이윤의 배타적 확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은 ‘제국주의’이고, 연사의 설명처럼 중국-미국의 갈등은 “고전적인 제국주의 갈등”인 것인가?

물론 ‘시장개혁’ 이후 중국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양적 비교만이 아니라, 질적 비교를 해야 한다. 중국의 ‘GDP 총액’이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하고, “일본의 굴욕”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일본은 인구 1억 3천만의 나라이고, 중국은 13억이다. 인구비로 10배의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생산성은 일본이 중국에 비해 대략 10배라는 뜻이다. 생산성이 이렇게 낮고 자기 나라에 임금이 싼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가 초과이윤 수취를 위해 자본을 수출하거나 식민지화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 소위 “고전적”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동안 세계를 상대로 침략과 약탈을 자행해왔고, 그에 저항하는 인민들을 무참히 억압하고 살육했다. 특히 1차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헤게모니를 확고히 거머쥔 미국의 만행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남한의 해방 직후 미군정이 저지른 만행과 6.25전쟁은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등에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군사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 중국은 어떠한가?

왜 미국은 더욱 강력한 경쟁자인 독일 프랑스 제국주의나 일본 제국주의 등에 대해서는 적대적 발톱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하면서, 유독 중국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군사적 적대 행위를 하는가? 그리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모든 ‘고전적’ 제국주의 국가들은 대 중국 적대행위에서 제국주의 상호간 이해의 차이를 내보이지 않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그 적대행위에 동참하는가?

이런 점들은 미국 등과 중국의 갈등을 단순히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갈등으로 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 등과 중국의 갈등은 소련 몰락 이전 나토(NATO)를 중심으로 단결한 제국주의 세력이 소련 중국에 펼치던 적대행위와 그 성격이 유사하다. (물론, 이 갈등 역시 토니 클리프를 지도자로 하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의 갈등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군사적 적대행위는 중국만이 아니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북한 쿠바 베트남 베네수엘라 등을 겨냥하여서도 행해졌고 행해지고 있다. 그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친제국주의 정권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한 노동자국가들이거나, 민족해방 투쟁을 통해 친제국주의 꼭두각시 정권을 타도하고 좌파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이다. 다시 말해 사회격변으로 인해 제국주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나라들이다.

결국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들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세력이 군사적 적대행위를 하는 것은, 그 지역과 그 지역 인민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장악력을 회복하고 나아가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각종 음모 정보전 외교/정치적 압박과 더불어, 군사 행위를 통해 그 나라들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 영향력을 가장 높은 초과이윤을 착취할 수 있는 수준으로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중국은 거의 삼십 년에 걸쳐 소위 ‘개혁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개혁을 진행해 왔고, 소련과의 불화 그리고 소련의 몰락은 이 흐름을 더욱 가속화했다. 그리하여 중국 사회 내부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급속히 증대했고, 그로 인해 정치 군사적으로도 자본주의적 관계는 영향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1949년 혁명 이후 수립된 중국 기형적 노동자국가는 지금 큰 위기에 놓여있다. 중국 관료집단은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다. 썩어빠진 스탈린주의 관료기구 중국공산당과 30% 정도를 차지하는 국유 기간산업과 국영은행은 그나마 자본주의 해일이 중국사회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을 가까스로 저지하고 있다.

올해 중국 관료기구와 세계은행이 공동으로 펴 낸 중국관련 보고서 <2030년의 중국: 현대적이고 조화롭고 창조적인 고소득 사회의 건설, China 2030: Building a Modern, Harmonious, and Creative High-Income Society>는 중국에 몇 가지 변화를 주문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대부분 국영은행인) 중국은행의 사유화, 국유기업(철도, 전력, 통신, 철강 등)의 사유화, 사적 경제 부문과 경쟁의 강화, 정치구조의 개혁 등이다. 이 보고서는 제국주의와 중국 관료집단 일부가 중국의 ‘전면적’ 자본주의 복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은 해당 나라의 노동계급과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재앙적 패배를 안겼다. 지난 20여 년간 세계 노동계급의 사기가 얼마나 추락했고, 각종 투쟁에서 패배를 연속해왔는지, 사회주의 세력이 얼마나 고립되고 위축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왜 ‘재앙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노동계급의 재앙적 패배’는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에게 20여 년 간의 유례없는 황금기를 열어주었다. 제국주의 군사침략, 식민지 인민 학살, 생활수준 후퇴, 대량 실업, 기아 등등 전세계 노동인민에 대한 고삐 풀린 가혹한 공격이 이 시기에 진행되고 강화되었다.

중국 내에 형성되고 침투한 자본가 계급과 제국주의 세력이 승리하여, 기형적이나마 존재하고 있던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자본주의가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재구축한다면, 위기에 빠진 세계 자본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세력은 또 다시 회춘할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격화되고 있는 계급투쟁을 통해 중국 노동계급이 전면적 자본주의화를 저지하고, 나아가 옛 소련처럼 자본주의의 도구로 점점 변해가고 있는 중국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진정한 노동자혁명을 통해 노동자 민주주의를 수립하고 침투한 자본주의적 착취구조를 분쇄할 경우, 전 세계 노동계급에게 결정적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다함께 중견 회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김영환 전기고문, 티베트에서 이어지는 분신자살, 신장 위구르에서 민족 억압, 에티오피아와 중국 관계, 짐바브웨 무가베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 등을 볼 때 중국은 명백한 제국주의 국가이다.’라는 것이 이어 발언한 다함께 동지 발언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미 한 차례 청중 발언을 한 지도자 최○는 청중 토론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또 다시 발언권을 요청했고, 사회자는 연사가 자신의 시간을 줄이겠다고 했다면서, 두 번째 발언을 허용했다. 과연 지도자였다.

“맑스는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엔 그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 없었다. 1949년의 중국혁명이 진보적인 것은 맞지만, 중국이 혁명 이후 제일 먼저 한 일이 티베트를 점령한 것이다. 소수 민족들을 지배했다. 마치 제정 러시아가 소수민족을 지배한 것과 같은 제국주의이다.

금융자본의 지배가 제국주의라는 레닌의 견해는 맞지 않는 것이다. 금융자본의 지배라는 규정은 당시 독일만 해당되고, 당시 영국은 산업자본주의였다. 자본수출을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보는 관점도 맞지 않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그런 점들에서 틀렸다. 정치적 결론만 옳다.”

연사는 정리발언에서 제국주의 규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힘센 나라가 제국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와 국가가 경제적 경쟁만이 아니라, 지정학적 경쟁을 하는 것을 제국주의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쟁점

다함께 동지들의 발언은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자. 하나는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므로 노동자의 ‘직접 행동’이 없었던 동유럽 중국 북한 등에서 수립된 국가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둘은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규정에 대하여.

1. ‘노동자의 직접행동’이 있어야만 노동자혁명인가? 노동계급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 이외에 노동계급이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던 북한 중국 쿠바 베트남 등은 노동자국가가 아닌가?

(이 문제는 사노위 내 강령토론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그 때의 답변으로 대체한다.)

이런 견해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맑스의 사상과 같을까?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세계 체제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일국적으로만 사고하는 관점이다. 만약 이 일국적 관점을 따른다면, 우리는 특정 나라에서 ‘사적 소유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폭력기구’인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타도되거나 사라진 뒤에도 그 나라의 노동계급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하거나, 다른 나라 노동계급이 그 나라의 자본주의 권력을 붕괴시킨 후에도 사회주의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충분히 재생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난센스에 빠지게 된다.

사회체제의 변화는 일국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체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도 세계적 차원에서 표현되며, 그렇게 이해할 때에만 온전히 그 역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프랑스 시민혁명(부르주아 혁명) 이후 일시적 반동기를 맞았을 때 나폴레옹이 등장했다. 주변 왕정국가들은 왕정을 타파하고 귀족을 일소한 프랑스를 보며, 한편으로 같은 일이 자국에서도 일어날까 봐 겁을 먹고 다른 한편으로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패했다. 그러자 그 나라들에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반봉건적 조치들 즉, 부르주아 혁명이 수행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은 상호 전쟁으로 인해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나라들이 ‘정치적으로’ 해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유럽과 북한 등처럼, 소련군이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지역은 부르주아적 소유를 철폐시켰다. 중국공산당은 오랜 내전 끝에 1949년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을 패퇴시켰다.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 노선을 내세우며 자본주의와의 공존(?)을 모색했으나, ‘공존’ 상대자인 국민당과 자본가 집단은 대만으로 도망가 버렸다. 생산수단을 사회화했다.

스탈린주의 중국공산당은 20년대 인민전선 정책으로 인한 패배 이후, 대도시를 버리고 농촌지역으로 쫓겨 농민의 지지를 업고 게릴라투쟁을 벌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승리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반자본주의적 조치들은 착수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또는 사적소유를 철폐했음에도 노동계급이 주도하지 않았으므로 반봉건적인 혁명인 것일까?

 

2.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규정

토니 클리프와 그 지지자들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핵심 사상들을 부정하고 여러모로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면서도 스스로를 한사코 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칭하려 한다. ‘자본주의 / 계급 / 프롤레타리아독재 / 노동자국가 / 사회주의 / 전위정당 / 제국주의’ 등등의 개념들에 대해 토니 클리프와 그 제자들은 레닌 트로츠키의 그것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 클리프주의라고. 그래야 뿌연 안개가 걷히고 무엇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해질 수 있다. 그래야 스탈린주의자들이 트로츠키를 가리켜 ‘국가자본주의론자야.’라고 말할 때 좀 더 부끄러워할 수 있고,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트로츠키주의를 가리켜 ‘스탈린주의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하는 무례를 좀 더 적게 저지를 수 있다.

정치이론은 유기적이다. 한 문제를 왜곡되게 바라보는 순간, 그 왜곡을 고수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다른 분야들도 ‘왜곡 수정해야’ 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제국주의 압력에 눌려 노동자국가를 잘못 이해하면서 나온 정치적 태도이다. 노동자국가를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러자,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 계급 / 프롤레타리아독재 / 노동자국가 / 사회주의’ 등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왜곡 수정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대중추수적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레닌의 전위정당론이나 제국주의론 등까지 ‘비판’하면서 수정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전쟁 등 가장 격렬한 계급투쟁은 대부분 제국주의 문제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현대 맑스주의에서 핵심이다. 그런데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그런 점에서 틀렸다. 정치적 결론만 옳다.”라면서 꺼내놓는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제국주의”라는 규정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맑스주의와 거리가 멀다.

특정 몇 나라가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국가, 나아가 모든 前자본주의 국가들, 심지어 약간의 관용을 더하면 동물의 왕국까지 포괄할 것 같은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규정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심각한 수정이다. 그에 비하면, 레닌이 그의 저작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단계』(1916)에서 행한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비판은 차라리 ‘과민하다’ 싶을 정도이다.

2012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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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 2012’ 참관기 4: ‘오늘날 그리스의 경제·정치 위기와 저항’

그리스의 격동과 자본주의 먹이사슬

2008년 시작된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역관계는 흔들리고 있다. 지배체제의 안정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배계급의 역량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반면 지배체제의 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노동계급과 피억압인민의 저항은 활성화되고 있다. 미국, 튀니지, 이집트 등에서 들리던 파열음은 이번엔 그리스에서 울렸다.

그리스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 소티리스 동지의 강연(7월 28일 토요일 16:00~18:00)은 그리스 상황의 윤곽을 이해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스의 격동은 은폐되었던 세계자본주의의 먹이사슬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스에서 그것은 ‘트로이카[(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로 표현되는 프랑스 독일 중심의 금융자본—그리스 정부—그리스노동계급’으로 표현된다. 노동계급을 착취하여 짜낸 이윤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금융자본의 손아귀로 집중되고, 각국 정부는 그 착취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각국 정부는 세계금융자본과 그 나라 노동계급 양쪽의 압력을 받으며 그 역관계 속에서 유지되거나 교체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각국 정부의 임무는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착취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불만이 축적되어 저항이 고조되고 그로 인해 그 ‘안정성’이 흔들리면, 교체된다. ‘안정’될 때까지. 그 사이 노동계급이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면, 우여곡절을 거치다가 결국 착취질서는 다시 ‘안정’된다. 그 대안은 혁명정당만이 제출할 수 있다.

 

강연

강연은 통역을 통해 전달되었다. 훌륭했다. 강연자의 유머감각까지 통역되었다.

다음은 강연요지이다.

지난 6월 총선에서 신민주당이 승리했다. 1차 총선에서 신민주당은 19%를 얻었는데 이는 역대 최저였다. 2차 총선의 30%는 역대 두 번째로 낮은 득표였다.

이번 총선으로 등장한 사마라스 정부는 파업과 시위로 쫓겨난 파판드로우 정부보다 더 약한 정부이다. 파판드로우 정부는 12 개월 만에 하차했고 파파데모스 정부는 6 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사마라스 정부가 3개월 만에 내려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4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 가지 약점이 있다. 경제 위기, 지난 2년간 20차례의 총파업으로 표현된 인민의 저항 그리고 혁명가의 힘이 최고조에 달해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공식 실업률이 23%이지만 실제로는 더 높을 것이다. 취업노동자에 대한 공격도 진행되고 있다. 공공노동자 임금이 30% 삭감되었고 연금도 깎였다.

그리스 자살률이 상승해서 매주 10명 이상 자살하고 있다. 75세 노인이 의회 앞에서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에서 그는 “쓰레기통 뒤지느니 죽는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스 정부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 소위 트로이카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그리스 노동자들에게 덮어씌우고 있다.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이다. 독일 총리는 그리스에 1. 모든 것 민영화 2. 공공부문 15만 명 해고 3. 연금, 임금 삭감을 숙제로 내주었다.

문제는 그리스의 경쟁력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그리스 아일랜드 등에 경제 기적이 일어났었다. 많은 유럽 자금이 몰려들었다. 직접 투자가 360억 유로에 달했다. 그리스 노동자는 보다 많이 노동한다. 독일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1400시간인데 그리스의 경우 2000여 시간에 달한다.

트로이카는 말하길 그리스는 스페인, 포르투갈과 다르다고 말한다. “전자는 은행 문제이고 그리스는 국가가 너무 퍼 줘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GDP의 160%에 이르는 국가부채는 기업주와 은행가들에게 너무 퍼주어서 발생한 것이다. 2008년 10월 구제 금융을 280억 유로 받았는데 지금은 1천 억 유로가 되었다. IMF가 요구하는 양해각서는 국제은행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위기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번질 가능성 있다. 그리스는 세계 경제에서 1.5% 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스페인 경제규모는 세계 4위이고 이탈리아는 3위이다. 이 두 나라에 위기가 발생하면 유로존이 붕괴할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프랑스 사회당의 올랑드는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 지도자 치프라스와의 면담을 거절했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에게 ‘투표 똑바로 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치프라스는 ‘책임 있는’ 야당이 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7%를 득표한 황금새벽이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준군사조직이며 나치 깡패들이다. 1930년대의 나치처럼 극심한 경제위기의 부산물이다. 국가와 정부는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1950년대에도 노동계급이 강력했다. 1965년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강력한 시위가 있었다. 2개월 동안에 정부 2개가 교체되었다. 그 당시 좌파들은 운동을 자제시키려 들었고 ‘책임 있는’ 야당이 되려했다. 좌파연합당에는 ‘진통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자본주의 근본 문제를 회피하고 사회증상을 그냥 완화시키려고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1967년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이 몸담고 있는 안타르시아(ANTARSYA: 반자본주의 좌파연합)의 핵심강령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것, 유로존을 탈퇴할 것, 대기업과 은행을 국유화할 것 그리고 모든 이민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 등이다. 한편 시리자는 “너무 많은 이민자가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반파시스트 공동전선에 미온적이고, 디폴트 선언에도 반대하면서 “(부채를) 갚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안타르시아는 2009년 1월 7개 좌익 조직 7,000여명이 모여 창립했다. 안타르시아 내부 핵심 논쟁은 두 가지이다. 먼저, 황금새벽당에 대한 공동전선에 대해 대부분 미온적이다. 다음으로, 선거전술 논쟁이 있었다. 2차 선거 독자 출마에 대하여 한 조직의 지도자는 공식 기관지에 “우리는 결선투표에서 시리자를 지지할 것이다.”라고 발표하기도 했으나, SEK의 설득으로 독자 출마하게 된 것이다.

 

청중토론과 문제제기

청중토론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하였다.

우리는 그리스와 같은 준혁명적 상황에서 노동계급에게 ‘일상적 요구에 기초하여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는’ 이행강령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사가 소개한 안타르시아의 강령은 일정하게 그 이행강령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간산업과 은행의 국유화가 그러할 것이다.

민영화를 통한 노동계급의 착취는 남한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남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한 맥쿼리가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 지하철 중 유일한 민영노선인 ‘서울메트로9호선’은 최근 요금을 50% 인상했다. 그 회사는 맥쿼리에 자본금을 빌렸는데 이자율이 18%나 된다고 한다.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이다.

나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귀환—동아시아는 어디로?’라는 강연을 듣고, “올 초 세계은행(World Bank)은 『중국 2030』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중국에 경제에서 30%를 차지하고 국가소유 기간산업과 은행을 사유화(민영화)하라는 요구를 했다. 한편으로 미국-일본 등은 중국에 대하여 군사적 적대행위를 지속하며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아직 ‘사회주의적’ 소유 체제를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압박이며, 중국 사회에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화하려는 자본주의 부활 책동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인 우리는 그에 반대해야 한다.”라고 질의/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연사와 다함께 활동가들은 답변을 통해 ‘중국 역시 제국주의이며 중국과 미국의 갈등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갈등이므로 둘 모두에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나는 그 답변이 연사인 소티리스 동지가 소개한 안타르시아의 강령과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기업과 은행 국유화 요구 말이다. 중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기존 국유화의 성과를 제국주의의 자본주의 복귀 압박으로부터 방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새롭게 제기되는 국유화 요구를 진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청중토론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훼손되었나

발언 내내 마이크 옆에 앉아 손짓과 표정 등으로 압박을 가하던 ‘지도자’ 최○은 발언이 끝나자마자 자리로 돌아가는 나에게 “왜 왜곡을 해! 그러면 안 되지.”하며, 삿대질을 했다. 이미 두 번의 청중발언 기회를 이용했지만, 내 발언 직후 ‘지도자’ 최○은 또 다시 발언권을 요구했고, 중국 강연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요지는 내가 다함께의 주장을 왜곡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항상 민영화 같은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반대해 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동등한 시간의 반박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지체 없이 거절되었다. 그러자 최○은 갑자기 일어나 내 발언에 대해 ‘인민재판’을 시도했다. 최○은 청중석을 바라보며, “방금 저 동지의 발언은 우리 입장에 대한 왜곡이다.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달라.”고 소리쳤다. 지도자 근처에 앉아 ‘지도자’와 눈이 마주친 몇몇 회원은 영문도 잘 모른 채 쭈뼛거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청중들은 그대로 있었다.

이어 연사는 청중발언을 통해 제출된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의도치 않은 소란으로 인해 가장 인상 깊었을 터임에도, 답변하지 않았다.

 

‘정신으로 계승되는’ 트로츠키

그렇게 강연이 끝났다. 일어서서 나오는 길이었다. 다함께 동지 한 분이 내 쪽으로 왔다. 국유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 동지는 내가 다함께의 입장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일본 우정국 얘기를 꺼냈다.

강연장 문밖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려는 중 최○이 다가왔다.

“그냥 가자. 회의가 있다.”

“이 분하고 얘기하던 중이다. 마치고 가겠다.”

“그 사람하고 얘기할 필요 없다.”

“이것 보십쇼. 좀 무례하지 않나?”

“누가 무례해? 우리가 주최인데 왜 여기 와서 방해하는 발언을 하느냐? 왜 왜곡하느냐?”

“다함께가 행사 주최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행사를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참가자는 주최 측 입맛에 맞는 발언만 해야 하나?”

“당신들의 행태를 잘 알고 있다. 당신들은 스탈린주의적이다.”

“뭐라고?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얘기하느냐?”

“당신들은 중국과 소련을 방어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스탈린주의이다.”

“당신은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 등을 읽어보지 않았는가? 소련방어노선은 트로츠키 정치의 핵심이다. 당신은 스스로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칭하면서, 어찌 트로츠키주의의 핵심을 스탈린주의라고 말하는가?”

그러자, 뒤돌아 떠나면서 외쳤다.

“트로츠키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글자를 계승하지 말고.”

“……”

 

‘남한 최초의 트로츠키주의자’가 남기고 간 ‘글자가 아닌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라는 말이 쟁쟁하게 맴돌았다. 나는 이 궤변을 10 년쯤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역시 말문이 막혔었고, 이후 그 희한한 말의 출처를 늘 궁금해 했었다. 그런데 그 근원의 일단을 찾은 셈이다.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의 ‘정신’은 그들이 남긴 저작을 통해 전해진다. 그들은 단지 천재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 혁명정신의 화신이었고, 그들의 저작들은 역사적 실천의 정수로 남아 있다. 소련에 대한 분석과 소련방어노선은 트로츠키가 남긴 업적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한다면, ‘트로츠키와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트로츠키주의는 말이나 문자로 표현되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는 심심상인(心心相印)의 선문답일랑은 그만 두고 말이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정치투쟁을 옹호하며

그 날 보인 ‘지도자’ 최○의 태도는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다. 이전에도 그가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해 스탈린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야 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정치투쟁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우리는 그 필요성을 『 제4인터내셔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안』 중 3항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3. 노동운동 내의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자본가 국가로부터의 독립

노동자당은 경쟁관계인 다른 정치조직이나 정당과의 공개적 정치투쟁을 옹호한다. 노동계급의 의식은 이러한 정치투쟁 속에서 또한 발전한다.

노동자당은 공개토론에서 다른 조직에 대한 배제와 폭력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욕설 등에 반대한다. 그러한 행위는 노동계급의 혁명의식 발전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정치의식 발전을 통해 혁명은 전진한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새로운 의식이 낡은 의식을 대체하면서 발전한다. 새로운 의식과 낡은 의식, 과학적 의식과 비과학적 의식, 노동계급의 혁명적 의식과 자본가계급의 노예의식은 ‘모든 곳에서 시시각각’ 충돌한다. 그 충돌 속에서 전자가 후자를 극복하고 제압할 때 혁명은 전진한다.

각 시기 구체적인 정치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무엇이 올바른 인식인지를 다투는 정치투쟁은 그 의식의 발전을 추동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으로 대표되는 선배혁명가들과 그 정당들이 해 온 작업의 핵심은, 바로 그들이 겪었던 구체적 역사와 그 정치상황에 조응한 정치투쟁이었다. 혁명 의지의 결합체인 혁명정당은 또한 그 정치투쟁을 통해서만 건설되고 성장한다.

따라서 진정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한다면 그러한 개인과 조직이라면, 정치투쟁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정치투쟁의 장에 나서야 한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자기조직의 안위를 위해 혁명의 안위를 외면하는 종파주의인 것이다.

 

다시 ‘거대담론’을 위하여

1990년대 초반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 중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노동계급 진영의 총체적 후퇴를 가져왔다. 노동계급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사회주의 이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노동계급의 정치에 기회주의가 대거 침투했다. ‘포스트’라는 말이 유행했다. 혁명사상은 주변부화 되었다.

많은 구(舊) ‘운동권’은 부르주아 진영으로 투항하거나 운동에서 멀어진 일상인이 되었다. 나머지는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달리 말해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지 않고도 운동할 수 있는, 노동자주의운동이나 부문운동으로 편입되었다. 노동자주의(조합주의) 운동이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전망’이 거세된 운동판에서 ‘현장’이니 ‘실천’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은 협소하고도 천박하게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이해는 물신화되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편승하여 자본가계급의 대리인들은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거대담론의 시대는 끝났다!” 소련의 붕괴로 인해 자본주의는 영구적으로 승리했으므로, 사회주의니 뭐니 바람 든 얘기 하지 말고, 자본주의 내에서 할 수 있는 소소한 얘기나 하라는 것이다. 그 동안 공산주의 유령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는데 앞으로 편안한 잠을 좀 자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그런데 노동계급은 다시 각성하고 있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 자본주의 모순은 노동계급의 ‘불온한 사상’을 잠들지 못하게 한다. 실업, 불평등, 전쟁, 학살, 환경파괴, 기아, 차별, 자살 등 자본주의의 모든 구멍으로 뿜어내는 오물은 자본주의적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체제 모순으로 인한 계급적 갈등은 세계정세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고열에 못 이겨 세계 이곳저곳은 뜨거운 공기를 내뿜으며 울룩불룩 솟고 터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의 꿈은 소소하지 않다. 우리는 세계질서를 송두리째 뒤엎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이윤을 지상의 가치로 조직된 자본주의 질서를 갈아엎고 인간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를 기획하고 있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형 프로젝트이다. 이것보다 벅차고 거대한 꿈은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다.

‘거대담론’은 다시 유행이 되어야 한다. 거대담론을 주고받는 정치투쟁은 골방에서 벗어나, 광장을 활보해야 한다. 치열하고 진지한 정치검증을 통해서 거대한 기획을 안내할 믿음직한 설계도가 마련될 것이다. 옥석이 가려질 것이다. 그 기획을 목표지점까지 일관되게 함께할 혁명 사령부는 오직 그 과정을 통해서만 마련될 것이다.

‘맑시즘 2012’ 참관기 1~4는 ‘거대담론’의 부활을 위한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201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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